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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인생의 겨울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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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인생의 겨울 준비

입력
2012.11.2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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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마다 세월을 절감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른 봄 나뭇가지 마다 새순이 트고 날마다 연록의 빛에 푸르름을 더할 때면 경외감에 젖는다. 그리고 이 봄의 정취를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잠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한여름 무더위에 지치면 선풍기 안에 손을 넣어보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세월의 무상함을 기억한다.

불타는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지만 다가올 겨울준비를 잊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잡는다. 낙엽의 고운 빛깔도 잠시… 마지막 잎새를 힘겹게 붙들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또 다시 인생의 겨울 채비를 채근한다. 그리고 나를 다독인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다고 나무가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듯, 육신의 죽음이 인생 여정의 끝이 아니라고. 끝이 아니기에 끝처럼 보이는 겨울을 준비해야 하고, 끝이 아니기에 소설의 한 단락을 마무리하듯 매듭을 준비해야 한다고.

지난주 89세의 연세에 아름다운 매듭을 짓고 가족과 헤어진 분의 장례를 도왔다. 임종에서부터 발인과 하관에 이르는 장례 순서를 도우며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 인생의 겨울 준비는 언제 어떻게 해야 하나. 더럭 회한의 칼끝이 나를 겨눈 것처럼 마음 한 자락이 서늘하다. 곰곰 따져보니 벌써 겨울의 초입이 아닌가. 준비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 이미 준비를 마치고 겨울을 맞아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나를 설득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수명이 다해 죽는 것이 아니라 소명이 다해야 죽는다고 목청껏 외쳐도 오는 계절을 피할 수 없듯 생의 마지막 준비를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 끝에 고인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인은 양택식 전 서울시장이다. 1970년대 개발시대를 이끌었던 주역의 한 분이다. 서울시장 재임 중에 지하철 1호선을 완공했고, 여의도 개발과 강남 개발을 주도했다. 반대도 많았고, 의혹도 비난도 많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일을 추진했다. 굳이 이름을 밝힌 까닭은 역시 고인의 겨울 준비에 관한 얘기 때문이다. 그 많은 개발이권이 얽혀있음에도 부적절한 일과 불명예스러운 일에 연루되지 않았다. 고인의 친인척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개발 지역에 땅 한 평을 사거나 소유하지 않았다. 후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 역대 서울시장의 비리를 샅샅이 조사한 결과, 고인의 전임 후임 시장이 구속되었을 때 비로소 그 분의 정직함과 근면함, 검소함이 드러났다.

어떻게 그 유혹을 이겼을까. 어떤 믿음이었길래 어려움의 시간들을 견뎠을까. 홀로 생각에 잠겨 듣게 된 말은 바로 이 한 마디다. "늘 끝을 대비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습니다." 재임 중에는 쉼 없이 끝을 기억하고 끝을 준비했기에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과거가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타협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도 원칙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믿음은 아름다운 끝을 준비했다.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수많은 비리와 부정을 보면서, 또 가까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일들을 대하면서 나를 돌아본다. 나는 제대로 준비하고 있나. 늘 허둥대다 제대로 된 매듭을 짓지 못한 채 달려오지 않았나.

최근에 하던 일들을 다 내려놓고 내 인생의 봄 여름 가을을 되돌아본다. 꿈에 부풀었던 봄과 세상, 영광에 들떴던 여름과 기대만큼 결실이 탐탁지 않았던 가을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계절은 이미 겨울을 맞았다. 좀 더 가을 정취에 젖고 싶지만 겨울을 재촉하는 비바람이 낙엽을 휘몰아가듯 인생은 그런 여유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올 겨울은 더 혹독하리라고 하지 않는가. 다만 잊지 말자. 언제나 겨울준비는, 언제나 죽음준비는 새 생명의 품 안에서 이뤄지는 또 다른 축복임을…

조정민 온누리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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