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작가들이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 모였다. 잘못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한숨만 짓던 자들이 모여 다함께 시국선언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게 옳은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만나 토론했다. 모였지만, 이 모임이 어떤 성격을 갖게 될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밤새 대화를 이어갔고 각자의 이름을 걸고 한줄선언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토론의 과정은 지난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에 담긴 많은 말들을 경청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실천들을 하나하나 구현하기 위해 그 방법들을 세세히 논의했다. 그 모임은 용산참사의 농성현장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4대강개발사업을 반대하기 위한 문화행사를 여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의 절차와 과정에 서로의 고민을 듣고 응답하는 작업에 가장 열중했다. 누가 더 유명한 작가인지 누가 덜 유명한 작가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고, 누구라도 모임에 함께 할 수 있었다. 과정이 아름답고 정의로운 방식의 모임을, 그때 나는 처음으로 경험했다.
정의로움을 경험하는 일이 귀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정의로움이 무엇인지도 거의 잊었을 뿐더러, 정의로움이 최상의 가치라는 것도 거의 잊은 듯하다.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로운 일들은 모두 꽁꽁 숨어버린 것만 같다. 신문을 펼쳐 읽어도 갖은 패륜과 갖은 패악으로 세상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만을 새삼 확인할 뿐이다. 언론은 이제 우리에게 공포와 불안이 증가될 만한 뉴스거리만을 다루려는 듯하다. 공포와 불안이 더 커지고 더 반복되면, 웬간한 불의와 공포에도 무감해질 것이다. 어떤 끔찍한 불의가 판을 쳐도, 더이상 피가 끓지 않는 사람이 우리는 서서히 되어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언론이 제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 이 시절, 우리가 꼭 알아 두어야 할 사회문제를 다룬 책 두 권이 출간됐다. 쌍용차 사태의 진실을 르포의 형식으로 담은 는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씨에 의해 쓰여졌고, 비참한 현실에 함몰돼 죽었거나 거의 죽음에 내몰린 이 나라 청춘에 대한 취재록 은 주로 인권문제를 취재해온 신문기자 임지선에 의해 쓰여졌다. 이 두 책은 모두 르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는 유명한 저자가 쓴 책이라 유명해졌고 은 그리 유명하지 않는 저자가 쓴 책이라 유명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정말로 크게 다른 점은, 유명한 는 저자가 다른 르포들을 참조하여(참조 과정에서 저자의 분명하지도 현명하지도 못한 태도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이 불거져 나왔다. 약자의 입장에 서서 사회를 고발한 책을 집필한 저자가 자신보다 약자인 저자에 대해 취한 태도에 실망한 이들이 많았다.) 내용을 채운 책이고, 은 저자가 직접 발로 뛰고 귀로 듣고 유가족들과 내몰린 당사자와 함께 울면서 손을 맞잡으며 쓴 책이다. 이 두 책의 정의로운 취지는 비슷하지만, 쓰여진 과정은 전혀 다르다. 한쪽은 거의 불의에 가깝고 한쪽은 냉철한 정의에 가깝다.
불의에 가깝다는 의견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해두고 싶다. 정의는 어느 한 영웅의 위대한 힘에 의해 구현되지 않는다. 상처받은 자와 함께 있어주는 것과 함께 있어준 힘으로 얻은 이해의 능력으로, 함께 앓아가며 약자의 육성을 곁에서 귀담아 들어주는 데에서 정의는 출발한다. 그래서 정의를 꿈꾸지만 우리는 정의를 구현할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비겁하게 살아간다. 약자 곁에 갈 시간도 없고 용기도 없으니까. 나 먹고 살기도 바쁘니까. 하지만 마음은 무겁고 괴롭다. 그럴 때 마음속 면죄부가 필요해진다. 공지영은 를 통해 면죄부를 갖고 한결 당당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정의를 실천했다는 착각은 갖고 있지 않기를 바래본다. 정의를 자처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약자를 외면하는 일, 약자를 수단으로 삼는 일, 정의에 잠시 발을 담그고 면죄부를 두 손에 꼭 쥔 채 쉽게 정의를 잠시 맛보는 일, 이 일은 안타깝게도 불의에 가깝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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