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제목은 지난 주말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발표한 새정치선언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인권 연구자인 필자로선 이 선언에 인권이 들어갔는지, 들어갔다면 어떤 식으로 언급되었는지 관심이었다. 읽어보니 일반론으로 평가했을 때 괜찮은 수준이었다. 선언문의 1장 '새로운 리더십과 새로운 국정운영 방식'의 첫째 조항인 '진정한 국민주권의 시대'에 나오는 문장을 보자.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고양하고, 완전한 시민권의 시대를 열겠습니다." 정치적 선언의 형식으로 나온 합의문에서 인권을 제일 앞쪽에 배치한데다 이 정도로 강하게 표현한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해도 될 만하다.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위의 글이 세계인권선언의 제1조에 나오는 저 유명한 문구,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의 변주임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은 두 가지 원칙 위에 서 있었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다시 말해 시민·정치적 권리와 경제·사회적 권리는 서로 나눌 수 없고, 모든 권리는 서로 떠받치고 있다는 통합의 원칙이었다. 또 하나는 국가와 시민 간에 사회계약에 근거한 시민권을 완성하는 것이 인권의 지향점이라는 원칙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나라의 국가운영에 참여할 권리가 있고, 인민의 의지가 정부권위의 토대를 이룬다"고 한 21조, 그리고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한 22조에서 이 점이 명확하게 제시됐다. 특히 2차대전 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시민권의 완성이라는 이상을 건국과 개발의 목표로 설정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거대한 공감을 주는 인권이지만, 1948년 탄생한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은 반세기 이상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선언의 제정과 냉전이 동시에 진행된 탓이었다. 자본진영은 주로 자유를, 공산진영은 주로 평등을 강조하면서 선언의 내용 중 자기 입맛에 맞는 부분만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측 공격에 악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제인권규약도 두 세트로 마련됐다. 또한 오늘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인권의 선별적 오용과 정치화, 이중기준 등의 씨앗이 그 당시에 이미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상이든 의제화된 후 상당 기간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권은 태어난 후 한창 자랄 시기에 발달장애를 겪어야 했다. 냉전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인권사상의 진정한 통합, 자유주의와 민주사회주의가 결합되고, 모든 사람의 시민권이 보장될 수 있는 국제질서가 도래했다는 희망을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신자유주의적 경제 지구화의 물결은 세계인권선언의 통합적이고 시민권적인 정신을 하나부터 열까지 무너뜨렸다. 시장이 극단적으로 득세하면서 평등은커녕 자유마저 축소되었고, 시민권이 사라진 자리를 재산권과 상품화가 채웠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2008년의 금융위기로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인권의 시각으로 보면 세계인권선언이 나온지 60년 만에 드디어 인권의 통합성을 실천할 수 있는 우호적인 인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자유와 평등이 모두 중요하고, 시민권을 완성하는 것이 인권의 진정한 목표임을 오랜 방황과 시행착오 끝에 깨닫게 된 것이다. 로 유명한 스테판 에셀의 신작 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세계인권선언의 가치와 권리들이 너무나 명백해 보이고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그것들은 빈번하게 무시되었습니다.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말은 소위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권의 맨얼굴을 경험해 본 우리에게 너무나 절절하게 다가오는 진단이다. 그만큼 인권을 위해 싸워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가올 12월10일은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고 12월19일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다. '완전한 시민권의 시대'에 동의하는 민주·인권 시민인가. 참여하고 투표하라.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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