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예쁘네." "이렇게 자그마했는데 이렇게 컸네."
지난 3일 김순금(54)씨는 그토록 그리던 엄마 품에 다시 안겼다. "엄마"라는 이름을 다시 부르는 데 46년이 걸렸다. 곱던 얼굴이 주름으로 덮인 엄마 남현조(88)씨는 연신 "울지 말라"며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리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모녀의 인연이 끊긴 건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과 8살이던 김씨는 엄마의 재혼으로 고향인 경북 봉화에서 고개만 넘어가면 있는 강원 태백의 탄광촌 한 식당에서 언니와 일을 하며 생활했다. 언니라고 해 봤자 고작 2살이 많았다. 어느 날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처음 보는 한 아주머니가"나를 따라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며 김씨의 고사리 손을 잡아 끌었다. 아주머니의 꼬드김은 거짓이었다. 당시에는 브로커들이 시골 어린이들을 속여 도시로 데려간 뒤 소개비를 받고 식모로 팔아 넘기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서울행 밤기차에 오른 뒤 김씨는 가족을 다시 볼 수 없었다. 태백에 남은 가족과
친지들이 삼척 등 인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김씨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김씨의 고된 '식모살이'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아주머니가 김씨를 데려다 놓은 곳은 서울 동대문구 신당동 한 가정집.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였지만, 학교교육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맞아가며 집안 일을 했다. 김씨는 "괴로울 때마다 언니랑 물가에서 가재 잡던 기억, 엄마가 해 주던 감자떡 맛처럼 행복한 어릴 적 기억을 곱씹으며 버텼지만, 점점 내가 어디서 살았는지 가족들 이름은 뭔지 조차 희미해졌다"고 말했다.
이러던 김씨가 가족을 다시 찾아보자고 마음먹은 건 주변 친구들의 친정 얘기 때문이었다. "식모살이를 하다 30세에 남편을 만나 애 둘을 낳고 지금까지 24년을 살면서도 항상 가슴 한 켠엔 엄마의 자리가 있었어요. 첫 아이를 낳을 때 엄마 생각에 엄청 울었지요."
'나한테도 아직 친정이 존재할까. 어머니는 살아계실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김씨는 지난 달 말 서울 구로경찰서 실종사건전담수사팀을 찾았다. 그 뒤 네 번의 조사를 받으며 벌목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 주변 풍광, '반야'라는 이름, 삼척, 태백, 소나무, 기차역, 큰 강 등 어린 시절 단편을 끄집어냈다.
어지러운 퍼즐 조각을 맞추는 건 서제공 실종팀장을 비롯한 실종팀 소속 경찰 5명의 몫이었다. 이들은 김씨의 기억을 바탕으로 전국을 뒤진 결과 김씨의 머릿속에 각인된 마을을 경북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 '반야마을'로 좁혔다. 직접 반야마을로 내려간 지난달 30일, 경찰들은 마을 경로당에서 잔치를 하던 어르신들 사이에서 김씨의 먼 친척을 만났다. 그는 김씨 큰 언니의 아들 이름과 연락처까지 알고 있었다. 잠시 끊어졌던 가족의 끈이 이어지는 천운의 순간이었다. 이후 경찰은 김씨와 친정 가족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유전자정보(DNA) 감정 결과, 친자관계가 성립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거의 반세기 만에 다시 가족을 찾은 김씨는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다. 김씨는 "우리 집에 어머니를 모시고 와 내 손으로 따뜻한 밥 한 끼 꼭 지어드리고 싶다"며 눈물을 훔쳤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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