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새로운 상무위원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다음으로 주목할 이가 리커창(李克强) 부총리다. 베이징(北京)대 학생회장을 지낸 그는 '최연소 장관' '최연소 성장(省長)' '미래의 별' 같은 수식어를 달고 늘 선두에서 달려왔다. 마지막 순간에 시 총서기에 밀렸지만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자리를 넘겨 받아 향후 10년간 중국을 이끌며 13억여명의 살림을 책임질 것으로 예상된다.
리커창은 1955년 안후이(安徽)성 딩위안(定遠)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리펑싼(李奉三)은 안후이성 펑양(風陽)현의 현장을 지낸 뒤 안후이성 지방지 판공실의 부주임(국장급)으로 퇴임했다. 아버지의 후광을 톡톡히 본 시 총서기와 달리 집안의 도움을 크게 기대할 수 없었던 그는 공부에서 1등을 놓치지 않으며 스스로 길을 개척했다.
그 역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중고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열아홉 살이던 74년 펑양현 둥링(東陵)촌으로 하방했다. 그곳에서 그는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5년 간 1만권 가까운 책을 읽으며 실력을 쌓았다. 82년 베이징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리 부총리는 이후 공청단 중앙으로 진출, 공청단 제1서기 후진타오(胡錦濤)를 만났다. 두 사람은 고향도 같다. 후 주석은 85년 청년대표단장으로 일본에 갔을 때 음식이 안 맞아 고생하는 자신을 극진히 돌보는 리커창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93년 공청단 제1서기(장관급)로 승진, 후 주석 자리를 물려 받은 그는 99년 전국 최연소로 허난(河南)성 성장에 취임했다. 2004년에는 랴오닝(遼寧)성 서기로 국가 프로젝트인 동북진흥 사업을 전개했다. 이 때부터 홍콩 언론들은 그를 '차기 최고 지도자에 가장 가까운 신세대'로 주목했다. 그러나 2007년 17차 당 대회 때 시진핑에 밀려 서열 7위 상무위원으로 진입하는데 그쳤고 이후 국무원 부총리를 맡았다.
그에게는 당 중앙의 지시에 충실, 민주화운동 탄압에 앞장섰다는 비판이 따른다. 그가 허난성과 랴오닝성에 있을 때 에이즈가 창궐하고 수백명이 숨진 탄광 사고가 잇따라 '대재앙의 별'이란 조롱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커창은 공청단의 적자란 점에서 탄탄한 조직과 인맥을 갖고 있는 실세다. 명석한 두뇌와 많은 행정 경험, 청빈한 생활과 철저한 가족 관리도 강점이다. 아내 청훙(程虹)은 베이징 수도경제무역대 영문과 교수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