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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서 하방생활... 25년간 지방 근무... 화합의 지도자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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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서 하방생활... 25년간 지방 근무... 화합의 지도자 '밑거름'

입력
2012.11.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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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習近平)이 중국의 새 지도자로 등극했다. 시진핑 신임 총서기는 이미 5년 전 차기 지도자로 내정됐던 만큼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개인적 고난을 극복하며 중국의 지도자가 된 그의 삶을 몇 개의 장면으로 풀어보았다.

권력 중심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난 아기

공식 자료에 따르면 시 신임 총서기는 1953년 6월 산시(陝西)성 푸핑(富平)현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당시 국무원 사무총장이었던 만큼 실제 태어난 곳은 베이징(北京)일 것으로 추정된다. 시 총서기의 이름이 '핑(平)과 가깝다'는 뜻의 진핑(近平)이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베이징은 예전에 베이핑(北平)으로도 불렸다. 공식 출생지와 실제 출생지에 모두 핑(平)자가 들어 있다. 베이징이 정치 권력의 중심이란 점에서 이러한 작명은 그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현재 호주에 살고 있는 두 살 아래 동생의 이름이 위안핑(遠平ㆍ57)이 된 것도 흥미롭다.

누나 옷을 물려 입고 자란 어린 시절

시진핑은 어렸을 때 늘 놀림을 받았다. 검소하고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두 누나 치차오차오(齊橋橋ㆍ63)와 치안안(齊安安ㆍ61)의 옷을 물려 받아 입었기 때문이다. 180㎝의 키에 100㎏의 건장한 체격인 시진핑은 어렸을 때에도 키가 컸다. 그런 그는 분홍색 또는 꽃무늬 옷이 창피했다. 시진핑 형제는 당 최고위층 자녀만 입학할 수 있는 베이징시의 바이(八一)초등학교를 다녔다. 인민해방군 창군 기념일(8월1일)을 지칭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이 학교 학생들은 주로 해방군 간부의 자식들이어서 옷을 잘 입었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유년기

1962년 아홉살 때 첫 시련이 닥쳤다. 부총리로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마오쩌둥(毛澤東)의 측근 캉성(康生) 당 중앙서기처 서기에 의해 류즈단(劉志丹) 사건에 휘말리며, 소설을 이용해 정권 전복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해임된 것이다. 문전성시였던 집에는 적막감에 감돌았고 곧이어 차별과 박해가 시작됐다. 어린 나이에 권력의 무상과 인간사의 비정함을 체험했다. 이후 1969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베이징의 다른 학생들처럼 지방으로 파견됐다.

자동차 엔진 꺼내 트랙터를 만든 슬기

그가 하방(下放)한 곳은 산시성 옌촨(延川)현의 작은 마을 량자허(梁家河)였다. 나무가 안 자라 동굴 속 집에서 생활할 정도로 오지인 그곳에서 그는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다. 견디지 못해 3개월도 안돼 도망쳤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인민의 품이란 생각에 복귀했다. 이후 현지에서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신뢰를 쌓아 72년 공산주의청년단에, 74년 공산당에 각각 입당할 수 있었다. 곧바로 량자허 서기에 임명됐고 옌촨현은 그의 업적과 활약을 인정해 업무용 자동차 1대를 내 줬다. 시진핑은 트랙터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동차 엔진을 빼 트랙터를 만들었다.

현장의 중요성과 도전에 대한 자신감

시진핑은 75년 옌촨현에 배분된 1명의 칭화(靑華)대 입학 자리를 차지, 그해 10월 만 6년간의 량자허 생활에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당시 마을 청년 10여명이 그를 30㎞나 떨어진 현까지 배웅하고서도 아쉬움이 남아 결국 여관에서 함께 밤을 지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시진핑은 훗날 "현장에서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인민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며,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누구든 도전하지 않으면 앞길은 열리지 않으며, 우리는 용기를 갖고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량자허 시절을 회고했다.

화려한 길을 마다하고 다시 지방으로

79년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 비서장을 겸직하던 겅뱌오(耿飇) 부총리의 비서로 일하게 됐다. 때마침 아버지가 연금에서 풀려 복권된 터라 힘을 써 준 덕분이었다. 시진핑은 80년 겅뱌오를 수행, 미국 출장을 다녀오는 등 탄탄대로에 올라선 듯 보였다. 그러나 82년 돌연 사표를 낸 뒤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부서기로 내려갔다. 중앙에서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기층조직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홀연히 떠났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시진핑은 푸젠(福建)성, 저장(浙江)성, 상하이(上海)시 등에서 무려 25년 동안 지방만을 전전하며 정치적 자산을 쌓았다.

무임승차 자매를 도와준 이야기

정딩현 서기 시절 열차로 출장을 가던 중 무임 승차를 하다 차장에게 걸린 자매를 보고 차비를 대신 내 준 적이 있다. 자매는 나중에 갚겠다며 이름을 알려달라 했고 그는 정딩현에 살며 성은 시(習)라고만 대답했다. 6개월 후 자매가 정딩현으로 와 그를 찾아 보니 서기인 시진핑이었다. 그는 또 청나라 시대의 거리를 재현, 영화촬영지와 놀이공원으로 조성한 것이 큰 성공을 거두며 중앙에서 '중국 관광 정딩현 모델'로 인정도 받았다.

감쪽같이 속인 국민가수와의 연애

시진핑이 정딩현을 거쳐 푸젠성의 샤먼(廈門)시 부시장으로 있던 87년 그가 시 간부들에게 결혼식이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첫 결혼에 실패한 그의 두번째 결혼이었다. 하객들은 결혼식장에 국민가수 펑리위안(彭麗媛ㆍ50)이 온 것을 보고 놀라면서 축가를 부르러 온 것이냐고 물었다.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소속의 대형 스타인 그녀를 모르는 중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때 시진핑이 "나의 신부"라고 소개했다. 당시만 해도 펑리위안이 훨씬 유명해 시진핑은 '펑리위안의 남편'으로 알려졌다. 펑리위안은 지금도 소장(한국의 준장) 계급을 단 현역 장성이자 인민해방군 예술학원 총장이다.

천량위 사태 수습하며 지도자로 부상

17년의 푸젠성 생활을 마친 뒤 2002년 저장성 성장이 된 그는 5년 만에 다시 상하이시 서기로 발탁됐다. 당시 상하이시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차기 지도자로 마음에 뒀던 천량위(陳良宇) 서기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거시 경제 정책을 공개 비판했다 부패 혐의로 기소된 후 민심이 흉흉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천 서기의 후임으로 공청단파 인사들을 밀었으나 장 전 주석이 거듭 반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양쪽 정파가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시진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어부지리의 측면도 있지만 원만한 성격으로 적이 없는 그는 화합을 내세워 상하이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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