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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유학파·태자당 맏형서 농민의 아들·기자 출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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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유학파·태자당 맏형서 농민의 아들·기자 출신까지···

입력
2012.11.1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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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더장보시라이 사태 수습 김정일 방중 때마다 영접 도맡기도●위정성장쩌민과 돈독… 칭다오 시장 지낸 친한파로 분류●류윈산신화통신 기자 출신 언론 통제 앞장 등 가장 보수적 인사●왕치산역사학도 출신 덩샤오핑 이후 경제로 눈 돌려●장가오리노동자로 사회 첫발 산둥성 서기 당시 경제 성장 성과 보여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당과 정부의 최고 권력 세력이다.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출범한 상무위원들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이 됐던 인물들이다.

한국말 유창한 장더장

3월 보시라이(薄熙來)의 낙마로 비게 된 충칭(重慶)시 서기 자리에 파견되면서 상무위원 진입이 예견됐었다. 시진핑이 2007년 천량위(陳良宇) 사건으로 흉흉하던 상하이(上海)시의 서기로 부임, 현지를 안정시킨 공로로 상무위원이 됐듯 장 부총리의 충칭시 서기 임명 역시 상무위원으로 가는 보증수표였다. 창홍타흑(昌紅打黑ㆍ공산당과 사회주의를 예찬하고 범죄와 부패를 척결) 정책으로 인기가 높던 보 전 서기의 퇴출은 민심의 동요를 부르기에 충분했는데 장 부총리가 무난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의 상무위원 진입을 가장 기뻐할 나라는 북한이다. 그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옌볜대에서 조선어를 전공한 뒤 평양의 김일성종합대로 유학을 간 친북파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로 북한을 갈 때 수행하며 신임을 얻었으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영접을 도맡았다.

2002년 저장성 서기일 때 장 전 주석이 항저우(杭州)에 시찰을 오자 자신이 먼저 노래를 한 뒤 실은 장 전 주석이 더 잘 부른다며 장기를 뽐낼 기회를 줘 그를 기쁘게 한 일화가 유명하다.

1946년 랴오닝성 타이안(台安)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인민해방군 포병사령관 출신의 장즈이(張志毅) 장군이다.

태자당 맏형 위정성

당 원로나 고위 관료의 자녀를 뜻하는 태자당(太子黨)의 맏형이다. 큰 할아버지는 대만에서 국방부장을 지낸 위다웨이(兪大維)이고 아버지는 초대 톈진(天津)시장을 역임한 황칭(黃敬ㆍ본명 兪啓威), 어머니는 베이징(北京)시 부시장이었던 판진(范瑾)이다.

같은 태자당 내 시진핑보다 나이가 여덟 살이나 많지만 그를 보좌하는 대범함을 가졌다. 범상하이방이라 할 정도로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돈독하고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공산주의청년단파와도 가깝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당시 어머니는 투옥됐고 여동생은 정신병을 얻어 자살하는 등 가족사는 순탄치 못했다. 형 위창성(兪强聲)은 1980년대 중반 국무원 국장으로 재직 중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5년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 출신으로 공산당 간부 자녀학교인 하얼빈(哈爾賓)군사공정학원 탄도미사일자동제어학과를 졸업했다. 98년 건설부 부장(장관), 2001년 후베이(湖北)성 서기를 거쳐 2002년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진입했다. 2007년 시진핑에 이어 상하이시 서기로 부임, 상하이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한국인이 많은 칭다오 시장을 지낸 인연으로 친한파로 분류된다.

기자 출신 류원산

신화통신 기자 출신이다. 당의 사상과 노선을 선전, 교육, 계몽하는 일을 한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 등의 기사와 내용을 통제한 장본인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단어를 금지어로 설정,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없게 했고 중국에 불리한 기사를 쓴 해외 언론사 사이트 접속도 막았다. 이 때문에 상무위원 중 가장 보수적 인사로 평가된다.

1947년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투모트(土默特)에서 출생한 한족으로, 64년 네이멍구자치구 지닝(集寧)사범대를 졸업했다. 잠시 교사생활을 하다 75년 신화통신 네이멍구 지국에 입사, 기자 생활을 한 뒤 84년 네이멍구자치구 선전부로 옮겨 부부장, 부장으로 승진했다. 91년 네이멍구자치구 츠펑(赤峰)시 서기를 거쳐 93년 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발탁되며 베이징으로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를 베이징으로 부른 것은 신화통신 사장이 된 친구로 알려졌다.

82년 공산주의청년단 네이멍구자치구 부서기를 지냈다는 점에서 후진타오 주석의 공청단파로 분류하는 시각이 있지만 장쩌민 전 주석의 영문 전기 출간을 도와 상하이방에 합류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역사학도 출신 왕치산

산시(陝西)성박물관에서 유물과 대화하던 역사학도 출신이다. 1948년 베이징에서 태어났으며 69년 문화대혁명의 혼란기를 맞아 산시성 옌안(延安)현으로 하방됐다. 힘들게 농사를 짓다가 산시성박물관에서 일한 것을 인연으로 73년 시베이(西北)대 사학과로 진학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선언하자 경제로 눈을 돌렸으며 82년 장인 야오이린(姚依林) 부총리의 도움으로 당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실로 들어갔다. 93년에는 주룽지(周鎔基)에 의해 인민은행 부총재로 발탁됐다.

97년 금융위기 당시 광둥(廣東)성 부성장에 임명된 그는 부실채권 금융기관들을 단호하게 정리해 이름을 알렸다. 2002년에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ㆍ사스)이 베이징에 창궐하자 시장으로 파견됐다. 왕치산은 "사태를 축소, 은폐하지 말고 사실대로 보고하라"고 관리들을 다그쳐 취임 한달 만에 사태를 막았으며 특급 소방수란 별명을 얻었다. 2008년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됐으며 이듬해부터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열리는 미중 전략경제대화의 중국측 대표를 맡고 있다.

농민의 아들 장가오리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지만 성실과 실력을 자산으로 최고 지도부 진입에 성공했다.

1946년 푸젠(福建)성 진장(晋江)에서 태어난 그는 열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70년 샤먼(廈門)대 계측통계학과를 나온 그는 석유부 산하 광둥(廣東)성 마오밍(茂名)시의 마오밍석유공사로 들어가 시멘트를 나르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그곳에서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그는 곧바로 광둥성 경제위원회 주임으로 발탁됐고 97년에는 광둥성 선전시의 서기로 승진했다. 당시 선전시를 첨단 산업과 자연 생태계가 어우러진 선진 도시로 개조, 주목을 받았다. 2001년 산둥(山東)성으로 옮겨 7년 동안 산둥성 성장과 서기를 지내며 줄곧 11~15%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는 성과를 보였다.

2003년 장쩌민 전 주석이 산둥성의 타이산(泰山)을 찾았을 때 산 전체를 봉쇄하고 극진히 모신 일화가 유명해 통상 상하이방으로 분류되나 태자당 리더 쩡칭훙(曾慶紅)이 그를 공직에 발탁했다는 점에서 태자당과도 가깝다. 공청단과도 사이가 좋다.

그가 추진한 정책이 과도한 빚에 의존한 것으로 후유증이 크다는 비판과 함께 톈진시를 금융 허브로 만들려던 계획도 사실상 실패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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