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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BBK 취재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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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BBK 취재파일'

입력
2012.11.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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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동이 정리돼가는 판에 한참 낡은 BBK 얘기를 꺼내는 게 썩 내키진 않는다. 검찰수사와 김경준의 귀국으로 사건이 맹렬하게 발화했던 게 벌써 5년 전이니까. 한데 불씨는 좀처럼 사위질 않는다. 원천적 의혹제기 글들이 여기저기 부쩍 많아지고, 옥중의 김경준도 '활동'을 재개했다. 정치권에서도 한마디씩 툭툭 던져댄다. 공교롭게도 다시 대선정국이다.

아끼는 후배기자들이 있다. 기자생활 태반을 법조에서 숱한 의혹을 다뤄온 베테랑 사건기자들이다. 무엇보다 요즘 언론세태와 무관하게 정파와 진영에 치우침 없이 사실(fact)만으로 묵직한 신뢰를 받아온 이들이다. 최근 이들이 책을 냈다. 사건의 발단부터 결론에 이르는 전 과정을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이다.

지난한 재추적 작업의 결론을 이들은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김경준이) 주가조작 등 금융범죄를 저지르고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미국으로 빼돌린 거액의 불법재산을 몰수당하고 한국으로 강제 송환돼 중형을 받을 것이 예상되자, 이를 모면하기 위해 2007년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상황을 악용해 거짓말과 위조한 증거로 대한민국을 농락한 사건'이다. 법조기자를 오래 한 탓에 문장이 공소장이나 판결문처럼 길고 난삽하긴 해도 의미는 명확하다. 1심 재판장이 김에게 "쥐 한 마리가 거짓연극으로 태산을 요동치게 한, '태산명동서일필'에 불과한 사건'이라고 한 일갈과 같은 뜻이다.

BBK 사건은 다들 익숙해도 워낙 복잡해 정확히 이해하긴 쉽지 않다. 한마디로 김이 설립한 BBK와 옵셔널벤처스의 불법행위에 MB의 연루여부를 가리는 사건이다. "BBK는 MB 것"이란 김의 주장은 수사와 재판에서 숱한 자료와 진술, 정황 등을 통해 배척됐다. 부분적 사안에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진 있으나 전체 틀에 영향을 미칠 만한 건 아니다. 주가조작, 투자금 횡령 등 김의 범죄는 MB가 그의 실체를 알고 관계를 끊은 후에 본격화한 것이다.

의혹을 키운 MB의 명함이나 BBK 언급은 재기를 도모하던 상황에서 능력을 과시하고픈 어설픈 동기에서 비롯됐다. 이게 검찰과 특검의 수사, 대법원까지의 긴 재판과정에서 면밀한 사실관계 확인을 통해 나온 일관된 결론이다. 상상을 넘는 김의 위조와 거짓행각은 수십 건의 문서 여권 위조 및 부실기재 단죄로 확인됐다. 책은 이 '기본'을 부정할만한 어떤 다른 근거도 없음을 꼼꼼하게 재확인한다.

그들이 민감한 시기에 이 민감한 작업을 하기로 한 건 다름 아니다. 이제 우리도 '정리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합당한 절차를 거치고, 아무리 합당한 설명이 거듭 제시돼도 논쟁사안은 언제든 부활을 반복한다. 다들 문제만 던질 뿐 정작 열심히 작성한 답안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니 한번 불거진 사안은 정리되는 법 없이 언제나 처음 상태로 되돌아간다. 새로운 것인 양 던져지는 추가의혹이란 것들도 기억 못해 그렇지 대개는 설명이 됐던 것들이다.

우리 정치문화를 개혁하고, 소모적 반복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낭비를 줄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정리문화다. 적어도 합리적인 답안은 받아들여 결말을 짓고, 다른 또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는 그런 문화다. 끝없이 되살아나는 좀비들이나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사회에 무슨 앞날이 있을까.

혹 특정정파의 유불리를 따져 오해는 말기 바란다. 의혹을 맨 먼저 제기하고 독하게 밀어붙인 건 당시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후보진영이었으니까. 나라가 어떻게 되든 눈 앞의 정파적 이익만 좇는 데는 여야도, 언론도 따로 없었다. 남 얘기도 아니다. 내 스스로도 답안을 본 기억들을 잊고 얼마 전까지도 무심히 의혹 운운했으니까. 어느 사회과학서보다도 새삼 이 책에서 받은 각성의 충격이 컸던 이유다.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이 시점에 우리사회의 진짜 문제가 뭔지를 깨닫고 반성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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