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대 어느 해쯤, 섬을 찾은 스페인의 코 큰 외국인이"이 섬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미지의 땅을 하나씩 점령해나가던 그들의 표정은 의기양양했으리라. 겁에 질린 섬의 원주민은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원주민은 눈치가 상당히 빨랐던 것 같다. 외국인이 나무에 눈길을 주는 걸 본 원주민은 다급하게 외쳤다. "이 나무? 보홀, 보홀."
필리핀 보홀(Bohol)로 가는 내내 마음은 설??? 출발 직전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환상적인 곳"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보홀에 도착하면 섬 이름을 묻는 외국인에게 나무 이름을 일러주는 원주민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별빛은 초롱초롱했고, 달빛이 은은했던 오후 늦은 시간. 섬의 서쪽으로 흐르는 아바탄(Abatan)강 위를 20여명 정도 태운 목선이 서서히 움직였다. 아바탄강을 현지 사람들은'만남의 장소'라고 부른다.
짙게 깔린 어둠 때문인지, 일행은 침묵했다. 안내인은 반딧불이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깜짝 놀랄 준비를 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린 시절 난 유난히 반딧불이를 좋아했다. 그리고 잘 잡았다. 또래의 친구들은 항상 나에게 반딧불이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경북 문경의 너른 집 마루에서 집 앞을 흐르는 개울 너머를 보면, 항상 한무리의 반딧불이가 춤을 추고 있었다. 반딧불이의 빛을 등불 삼아 공부했다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을 믿지는 않았지만, 한 두 시간 열심히 채집을 하면 빈 음료수병 가득 반딧불이를 잡을 수 있었다.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가 내뿜는 빛은 신기할 정도로 밝았다.
배가 출발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정말 반딧불이가 보였다. 개구리 등 천적의 공격을 피해 밤이면 나무 위쪽에 모인다는 게 안내인의 설명이었다. 강가의 몇 그루 맹그로브(Mangrove) 나무가 빛을 냈다. 수 십, 수 백, 아니 애초에 몇 마리의 반딧불이가 모여 있는지 세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고정된 빛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점멸하며 이동하는 살아 있는, 눈부신 빛의 선율이었다. 함께 배를 타고 온 이들은 연신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댔다. 결과물은 썩 좋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들의 군무는 애당초 사진기가 아닌 눈을 통해, 마음에 담아두는 수 밖에 없는 '빛의 파동'이었다.
어디서나 전설은 있기 마련인가 보다.
아로고(Arogo)라는 거인이 있었다. 아로고는 알로야(Aloya)라는 이름의 여인을 사랑했다고 한다. 여인 역시 거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여인은 사랑을 거절했고, 거인은 여인을 납치했다. 전설의 대부분이 비극인 것처럼, '당연하게도' 여인은 거인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뒀다. 왜 죽었는지 역시 모르겠다. 다만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인, 그 눈물은 하나씩 굳어 수많은 구릉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둘째 날 덜컹거리는 비포장 숲길을 달려 섬 내륙의 한복판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안내인은 보홀을 대표하는 자연 경관인 '초콜릿 힐(Chocolate Hills)'의 전설을 전했다. 안내인의 설명 도중 누군가 외쳤다. "입구에서 ○○○초콜릿을 팔면 장사 좀 되겠다." 모두 맞장구를 쳤다. 전설의 구슬픔은 한 순간에 날아갔다.
안내인은 섬 중앙의 대평원에는 제주도의 오름이나, 경주의 고분처럼 원뿔형으로 우뚝 솟은 언덕이 1,268개에 달한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언덕이 만들어졌는지는 미스터리다. 거인의 전설과 별개로 200만년 전 바다 속 지면이 솟아오르면서 육지가 되고, 산호층이 엷어지면서 지금의 언덕이 됐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초콜릿 힐의 장관을 즐기기 위해 214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원래는 210개의 계단이었는데, 밸런타인데이인 2월 14일의 숫자에 맞춰 4개를 추가했다고 한다. 정말 214개인지 궁금해 하나, 둘 세다 어느 순간 잊어버렸다. 초콜릿 힐의 전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여행객들은 손으로 초콜릿을 집어 드는 모습이나 빗자루를 타고 나는 자세로 사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초콜릿 힐에서 남서쪽으로 1시간을 달리면 '필리핀의 아마존' 로복(Roboc)강에 도착한다. 아마존을 실제로 보고 온 사람이라면 실망하겠지만, 이곳 역시 유명한 유람선 투어 코스다. 3㎞ 구간을 가면서 여행객들은 유람선에 마련된 필리핀 전통 음식과 로복 출신 음악가의 통기타 라이브 공연을 즐긴다. 가볍게 식사를 하면서, 여유롭게 강가의 풍경을 즐기는 것이 투어의 모든 것이다.
음악가의 노래는 뭔가 묘한 것이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그의 통기타는 조율이 어긋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반주와 노래가 어색하지 않다. 음악을 조금 안다는 일행 한 명이 이를 지적했지만, 들은 척 만 척이다.
노래가 잠시 멈췄다. 강가에 마련된 무대 옆으로 배가 잠시 정박했다. 전통 의상을 입은 현지 주민들이 노래와 전통 대나무춤 '티니클링'을 선보였다. 투어 중인 배들은 쉴새 없이 무대 옆으로 다가왔다.
5분이 채 되지 않는 공연은 1~2분의 짧은 휴식 시간을 제외하곤 무한 반복됐다. 안내인과 함께 여행객 무리가 사진을 찍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 물론 공짜는 없는 법. 공연도 즐기고, 사진도 찍었다면 모금함에 1달러 정도는 기부하는 게 예의란다.
보홀의 여행자가 빼놓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돌핀 워칭', 즉 돌고래를 보는 관광이다. 공항에서 내리지 마자, 현지인들은 "배를 타고 조금 먼 바다로 나가면 몇 무리의 돌고래 떼가 수면 위로 날렵하게 뛰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며 "보홀에 왔으면 꼭 보고 가야 한다"고 연신 자랑할 정도다.
하지만 난 보홀의 바다를 즐기지 못했다. 보홀에 도착한 날부터 비는 거셌다. 억세게도 운이 없었다. 비가 오면 돌고래가 바다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겨버리기 때문일까. 돌고래 관광을 하는 배는 운행조차 하지 않았다. 배가 뜨지 않았으니 당연히 대부분의 여행객이 즐기는 파밀라칸(Pamilacan) 섬의 스노클링도 하지 못했다. 아!
산호초와 열대어, 갑작스레 나타나는 깊은 해구. 바다 속을 마음껏 유영한 여행객은 파란 하늘을 지붕 삼아 보트 위나 해변가에서 휴식을 취하겠지. 창을 활짝 열었지만, 여전히 비는 거셌다. 들리는 말로는, 필리핀에서 가장 비가 많은 때는 11월 정도까지라고 한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보홀 여행의 가장 좋은 때를 즐길 수 있다는 건데, 아쉽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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