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 소설문단은 김승옥이라는 천재의 등장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김승옥 이전의 작가들은 일제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해서 소설 문장이 고답적이었고 전쟁이라는 상처에 얽매여 지극히 실존적이고 암울한 세계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김승옥은 달랐다. 그는 한글로 교육받은 세대답게 근대적 개인의 정체성을 포착하는 위트와 지적 세련을 동반한 문체로 한국소설에 감수성의 혁명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 된 데는 내가 당선되던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선생께서 심사를 맡아보신 소이연이 있다. 아니 아무리 그랬다 해도 내가 작가 김승옥의 문체에 뜨겁게 감염됐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언감생심 선생께 주례를 청했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결혼식 당일, 이윽고 주례가 시작됐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선생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선생은 말씀하셨다. "작가는 통장과 전답을 갖지 않아야 한다." 작가란 무릇 물욕에서 자유로워야 참다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13년이 흘렀다. 그날 이후 내가 선생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날의 그 뜨거운 기억과 가슴속의 맹세는 아직까지 내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스스로를 삼가게 하고 있다.
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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