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냐, 살해냐'
1심 판결에서 살인으로 결론이 내려졌던 화재현장의 20대 여성 사망사고가 2심에서 뒤집혔다.
지난해 9월 17일 낮 12시쯤 서울 역삼동 한 원룸에서 발생한 화재현장에서 흉기로 찔린 채 연기에 질식해 욕실 안에 쓰러진 20대 여성 A(25)씨이 발견됐다. 유흥업소 종업원인 A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숨졌다. A씨의 양쪽 목에 자상이 2군데 발견됐고, 왼쪽 옆구리 부위와 좌측 팔 부위에도 칼에 베인 상처가 나왔다. 당시 방에는 뚜껑이 열린 채로 비어있는 시너통과 타다 남은 라이터 기름통도 발견됐다. 방바닥에서는 피가 묻은 거즈 조각 등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경찰은 화재 직전까지 A씨와 함께 방에 머물렀고 평소 피해자와 다툼이 잦았던 룸메이트B(25)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화재 직후 B씨가 A씨의 휴대폰을 이용해 A씨인 척 외부로 수 차례 연락하고, A씨에게 4,700만원을 갚으라며 차용증을 쓰게 한 뒤 A씨 동생에게 보증을 서라고 요구한 진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B씨가 A씨의 애완견을 죽이고, A씨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음료수를 마시게 해 실신하게 만든 과거 전력도 B씨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는 유력한 정황이었다. 결국 B씨는 살인미수와 방화 혐의로 기소됐지만 1심 재판과정에서 그는 무죄를 주장했다. A씨가 자해를 한 뒤 스스로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친구가 신나를 들고 뿌리길래 이를 말리고 나왔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문제는 목격자나 CCTV영상 같은 직접 증거는 없고 각종 정황과 관련자 진술을 통해 진상을 파악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부장 유상재)는 지난 5월 B씨 주장을 배척하고 검찰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B씨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변명과 책임 회피를 위한 궤변만을 늘어놓으며, 공소사실을 단 1%도 인정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당돌하고 후안무치한 법정태도를 보였다"며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의 판단은 180도 달랐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윤성원)는 13일 "유죄를 의심할 만한 간접 증거나 정황은 있지만,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법관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심증을 갖기에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친구 사이의 다툼과 갈등이 있었지만 특별한 정신병력도 없고 전과도 없는 B씨가 공소사실처럼 잔인하고 계획적으로 피해자를 살해하려 할 만한 동기로 충분치 않아 보인다"고 밝힌 뒤, ▦B씨가 A씨를 가장해 다른 사람들과 통화한 사실 ▦B씨가 A씨를 해코지한 전력 등 유력한 정황을 단정적 사실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에 "A씨가 나에게 빌렸던 4,700만원에 대해 '갚을 자신이 없다'며 보험금으로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자해했고, 실랑이 끝에 흉기에 찔린 뒤에도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거부했다. 그 뒤 내가 방을 나선 뒤 A씨가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 항변한 B씨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검찰은 항소심의 무죄 결정에 대해 상고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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