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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71> 청년 전태일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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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71> 청년 전태일 분신

입력
2012.11.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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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13일, 스산한 날씨였다. 이날 오전부터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는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노동자들의 시위가 예상되자 경비원들과 경찰병력이 대거 출동한 것이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시장 앞에 모인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경찰 경비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순간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쥔 젊은 청년이 나타나 온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당겼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외침과 함께 청계천 6가 구름다리 앞에서 화염에 쓰러져간 젊은이는 평화시장 피복공장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스물 두 살의 청년 전태일이었다.

숯덩이처럼 온 몸이 그을려서야 평생 가보고 싶었던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명동 성모병원에서 어머니 이소선여사의 손을 붙잡고 숨을 몰아 쉬었다."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세요."유언을 남긴 그는"배가 고프다" 는 한마디 말과 함께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서울대 상대 학생들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고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다른 대학들도 잇따라 시위에 동참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추모행사를 공동으로 열었고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이듬해 1월 전태일정신의 구현을 대선공약으로 발표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현실에 짓눌려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고 있던 모든 민중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며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48년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전태일은 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올라왔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학교를 그만둔 뒤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여기서 재봉 기술을 배운 그가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일하며 14시간의 힘겨운 노동으로 벌어들인 하루 일당은 겨우 50원. 당시 차 한잔 값이었다.

산업화를 구실로 자신을 포함한 어린 학생들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 내용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노동 실태를 조사하며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려주던 그는 69년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했고 이듬해는 이를 발전시켜 '삼동친목회'를 결성했다. 노동환경 개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전태일은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며 사업주들과 임금, 환경개선 및 노동조합 결성 등에 대한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사업주들은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정부 또한 태도를 바꿔 책임회피에 급급할 뿐이었다.

사건 당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위해 모인 노동자들 앞에서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인간다운 노동자의 삶을 일깨운 전태일정신은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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