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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도랑에 든 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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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도랑에 든 소처럼

입력
2012.11.1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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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내 고향 풍경 중 하나는 봄날 들판의 도랑이다. 멀리 산 밑 저수지로부터 너른 들판에 물을 끌어대는 도랑은 모내기 철이 시작되기까지는 온갖 들풀의 세상이다. 아지랑이 가물거리고 하늘 높이 종달새 우는 이른 봄날엔 쑥부쟁이 씀바귀 냉이가 지천이다. 동네 누나들이 댕기머리 팔랑거리며 도랑에서 봄나물을 캐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봄이 더 깊어 보릿대 솟아오를 즈음 도랑은 소들이 먹기 좋은 잡풀들이 무성하다. 어른 가슴팍 높이의 도랑 안에 소를 풀어 놓으면 방울소리 딸랑거리며 양쪽의 보들보들한 풀을 싹둑싹둑 잘도 뜯어 먹는다. 겨울철 마른 볏짚 먹이에 질렸던 소에겐 정말 맛있고 영양 만점의 식사다. 소가 본격 농사철을 앞두고 살을 찌우고 힘을 비축하는 때다. 소 몰고 나온 아이들은 도랑에 들어간 소 걱정 하지 않고 맘대로 놀 수 있어 좋다.

'도랑에 든 소'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쓰던 말이다. 우리 경제가 후발주자 중국과 앞선 기술의 일본 사이에 끼어 샌드위치 신세의 위기라거나, 외교안보적으로 미중 갈등 사이에 괴로움을 겪는다는 진단을 거부하고, 우리 하기 나름으로는 양쪽으로부터 다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며 비유한 게 바로 도랑에 든 소였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을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로 여기는 낙관적 통찰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내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재선과 시진핑 중국 5세대 지도부 출범을 계기로 세계 무대,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G2 시대가 본격화했다. 기존 패권국과 그에 도전하는 신흥 강대국 사이에 낀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에 대해 불안과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국민들은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할 비전과 리더십을 대선주자들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박근혜의 신뢰외교, 문재인의 균형외교, 안철수의 중첩외교 구상은 이렇다 할 감동을 주는 답이 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도랑에 든 소'가 출발점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한판 대결이 불가피해 보이지만 협력도 꼭 필요한 요소다. 대결과 협력이 중첩ㆍ복합될 수밖에 없는 도랑 구조에 우리가 운신할 공간이 있다. 두 강대국이 대결을 하든 협력을 하든 한국의 도움이 없으면 아쉬운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아쉬움을 지렛대로 대결적 요소는 가능한 줄이고 협력적 지향에 힘을 실어주는 외교적 지혜가 필요하다.

동아시아의 판을 주도할 국력은 대한민국에 없지만 두 강대국 사이에 낀 힘 없는 약소국의 단계는 벗어났다. 세계 15위권의 경제력이다. 노무현 시대의 균형자론은 과하다 해도 우리 하기 나름으론 미중 각축 속에서 상황을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어갈 만한 토대는 갖췄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문제는 우리에게 발언권이 있다. 북한문제가 미중 갈등의 빌미로 이용되지 않게 우리의 힘과 발언권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시야를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무대로 돌려도 우리가 운신할 공간이 넓어졌다. 세계적인 전자 조선 자동차 산업, 연임 유엔사무총장 배출과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재진출, 녹색기후기금(GCF) 유치, 지구촌 한류 열풍 등 어느 새 우리는 국제사회가 선망하는 자산과 매력을 상당히 갖게 되었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도랑 구조에도 우리의 역할 공간이 있다.

구슬은 이미 서 말이다. 누가 이를 잘 꿰어서 대한민국을 매력적이고 저력 있는 중견국가, 미들 파워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당장 대선후보들에게 그런 비전과 그림을 제시하라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것은 특정 주자만이 아니라 여야, 진보 보수를 떠나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연하고 통찰력 깊은 지도자가 그런 노력의 구심점에 서야만 가능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 벅찬 꿈을 꾸게 할 싹수를 조금이라도 보이는 후보가 있으면 무조건 한 표!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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