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나라 황제의 능 13기가 몰려 있는 '명십삼릉'은 만리장성, 이화원, 천단 등과 함께 베이징 인근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다. 이 곳의 명물 중 하나가 '만력황제 무자비'다. 문자 그대로 '문자 없는 비석'이다. '고인의 사적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이라는 비석의 사전적 정의에 비추어보면, 존재 이유를 몰각한 비석이라고 해도 좋다.
안내인은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이 '존재 이유를 몰각한 비석'이 존재하는 이유를 대개 이렇게 설명해준다. "만력제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바로 그 황제입니다. 이 사람이 황제일 때부터 명나라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무능했지만 과시욕은 아주 심했습니다. 자기 무덤 앞에 세울 비석을 만들기 위해 글 잘 하는 신하들에게 글을 짓게 했는데, 문장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사람의 글로는 내 공적을 묘사할 수 없다'며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말라고 했답니다." 관광 안내인들의 설명이 으레 그렇듯, 정반대의 설명도 있다. "만력황제는 명나라 역사상 가장 무능한 황제였습니다. 기록할 만한 공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글자 없는 비석을 세운 겁니다." 두 설명 모두 정확하지는 않지만, 앞의 설명이 사실에 조금 더 가깝다. 글자 없는 신도비(神道碑)를 남긴 건 만력황제만이 아니다. 글자를 새기지 않은 신도비를 남긴 명나라 황제는 만력제 말고도 여럿이 있다. 무자황제신도비는 명나라 시대에는 일종의 관행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만력제의 무자비만 거론되는 까닭은, 그의 신도비가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의 망자존대한 성품과 무능이 무자비와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만력황제 무자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유물이 있다. 1902년은 고종 즉위 40년이자 망육순(51세)이 되는 해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해를 맞아 대규모 축전을 준비했다. 민간에서도 고종의 치적을 칭송하기 위한 '자발적'인 운동이 벌어졌다. 물론 백성들의 처지에서 이런 '자발적' 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으레 관권에 기댄 모리배들의 금품 강요에 순순히 응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자발적' 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기념물이 광화문 네거리의 '칭경기념비전'과 환구단 경내로 이전된 세 개의 석고(石鼓)다. 기념비전 안의 기념비에는 고종의 공적을 칭송하는 글이 새겨졌으나 돌북 모양의 비석인 석고는 '무자비'로 남았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그 경위는 이렇다.
먼저 김성근이 돌북을 만들어 고종의 공적을 기록하자고 건의했다. 고종이 승낙하자 김성근 등은 '성상의 공적을 칭송하는 돌북을 세우기 위한 모임'이라는 뜻의 송성건의소를 만들고 강제 모금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임의 부의장으로 추대된 이유승이 직책을 사양하고 상소를 올렸다. "역대의 제왕으로 그 덕망과 업적을 기록한 것은 오직 책으로 전한 것뿐이며, 비석을 세워 자기 덕을 칭송한 것은 진시황 때부터 시작됐습니다…성군의 업적은 경전과 사전(史傳)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비석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성상의 업적은 사가들이 기록해 후세에 전할 것이니 어찌 한 조각의 돌에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중지하라는 특명을 내려 겸손한 덕을 빛내시기 바랍니다." 고종은 아마 이 상소를 보고 머쓱했을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를 신격화하는 말들이 난무한다. 옛날의 간신들은 자기 임금이 요순우탕(堯舜禹湯)보다 낫다고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금도조차 사라져 낯 뜨거운 아첨이 난무한다.
지도자를 후세의 조롱거리로 만드는 건 비판세력이 아니라 측근의 아첨세력이다. 당장 측근들로부터 한때 '단군 이래 최고의 지도자'라는 칭송을 받던 분이 지금 어떤 형편인지만 보아도 쉬 알 수 있을 터이다. 후보자들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주변의 아첨 세력들을 멀리 해야 한다. 아첨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서는 결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유권자들도 이 역사의 평범한 교훈을 직시해야 한다. 간신이 칭송해 마지않는 주군은, 언제나 폭군과 혼주였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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