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도 확 다른 춤 추게 된 사연
71년 24개국 순방 때 '끔찍' 평론
우리 춤 정통 살리려 무용계도 떠나
민중의 힘 얻어 고구려 역동성 회복
87년 시국춤 '바람맞이 꽃'
박종철 고문 치사 등 춤으로 표현
학생들이 에워싸고 함께 거리로
그후 입으로만 일하는 이들에 실망
퇴임 후의 계획은…
싸이·김연아·손연재가 주는 감동
우리 춤의 역동성과 닿아 있기 때문
춤대학 만들어 제대로 가르치고파
이애주(65)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교수가 정년을 맞았다. 87년 민주화 운동의 현장마다 불을 붙였던 춤꾼. 서울대 교수이면서 맨발로 마당춤을 마다 않았던 민주화 운동의 상징. 그러나 88년을 끝으로 한동안 그는 현장 춤에서 멀어졌다. 그 대신 중요무형문화재 27호인 한성준-한영숙류 승무를 익혀 99년에는 인간문화재가 됐다. 그 후에는 우리 춤의 뿌리를 찾아 고조선 강역과 바이칼호수 주변을 다니고 홍역(한학자 야산 이달이 주역을 개혁한 역서)을 공부하고 천부경을 외며 동방문화진흥회에서 전통사상에 빠져 들었다. 좌에서 우로 급선회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과거와 결별하는 것일까. 아니었다. 그는 본질로 들어가서 인간의 몸이 가장 자연스런 상태로 해방감을 주는 우리 춤 자체를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가 거부한 것은 사람보다 목적이 우선인 운동과 그의 춤이 수단만 되던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_갑자기 활동이 많아졌네요.
"지난 목요일에는 정년퇴임을 기념해서 서울대학교 문화관 중강당에서 특강과 공연을 했고요, 12일 저녁은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승무 발표회가 있어요. 13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조계사 옆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저의 춤세계를 학술적으로 풀어보는 학예굿을 해요. 이이화 선생 채희완 유홍준 교수등이 발제하고 김명곤 전 장관이 축사를 해요. 마지막에는 제가 직접 춤을 추면서 이야기도 하고요. 18일 홍성에서 한성준 선생을 기리는 승무를 춥니다. 그 동안도 꾸준히 춤을 췄는데 요즘은 기획사가 안 끼면 공연장 얻기도 힘들고 신문에 기사도 안 나서 그렇지요."
_올해로 춤 인생 60년이라고요?
"엄마가 경기고녀를 나왔는데 어렸을 때 천도교 수운회관 자리에서 방정환 선생님한테 노래하고 유희를 배웠대요. 피아노 바이올린도 할 줄 알고. 다섯째인 내가 다섯살 때부터 동네 어른들이 민요를 부르면 춤을 곧잘 추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창덕궁 옆의 국립국악원엘 데려갔어요."
_전통춤을 추면 공부는 제쳐놓는데 어떻게 서울대까지 갔어요?
"어머니가 국악원에 손잡고 다닐 때도 구구단을 외우게 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성적이 떨어지니까 엄마가 문을 잠그고 춤추러도 못 가게 했어요. 창덕여중 창덕여고 나왔는데 고등학교 때는 지도 교사가 무용 전공이 아니라서 내가 무용부 지도까지 하면서 공부는 다 했어요."
_승무를 전수한 한영숙(1920~1990) 선생과 인연은 언제 생긴 거예요?
"서울대 가려면 상장이 필요하대서 고 3때 무용협회 주최 콩쿠르에 나갔는데 장구춤을, 춤만 춘 게 아니고 본격적인 가락을 넣어서 설장구를 막 두드려부수면서 춤을 딱 추니까 만장일치로 특상(최우수상)이야. 대학에 가서 4학년 때인가(1968년)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에 나가서 특상을 받았어요. 그때 심사위원이 한영숙 선생님이야. 1970년에 인간문화재 되자마자 나를 불러서 '전수자 이수자 있어야 되니 네가 와서 배워' 하시더라고요."
_민중 춤을 추지 말라는 게 그분이었다는 말도 있던데 어떤 분이셨어요?
"선생님 앞에 가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고 모자란 걸 느끼고 한번이라도 더 춰야지 배워야지 그런 생각만 드는 거야. 이러구 저러구 얘기한 게 아니라. 전통춤이라고 하면 기생춤, 보여주는 나른한 춤을 추는데 선생님 춤은 아주 기상이 있어요. 이매방 선생님의 춤도 참 좋아해요. 아주 예술적이지. 인격도 멋지고. '나는 기방에서 자랐고 그래서 기생춤을 춘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우리춤에는 고조선부터 내려오는 말 달리고 활 잘 쏘는 고구려의 역사가 담긴 그런 활달한 춤도 있거든요. (한영숙의 할아버지로 전통 춤을 집대성한) 한성준(1874~1941)이 살린 춤에는 그런 게 있어요. 그게 내 마당춤으로 이어지는 거지."
_스승과도 확 달라진 춤을 췄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서울대 다니고 무용대회 상도 받고 그러니까 국립무용단에 들어갔잖아요. 71년에 해외 24개국 순방 공연을 한다고 6개월 연습하는 데 진땀이 막 나요. 진짜 우리춤은 풀어주는 춤인데 이건 굉장히 인위적이라 몸이 견딜 수 없게 아픈 거예요. 탈의실에 들어가서 땀을 닦으면서 쉬고 있는데 원로 무용가가 문을 홱 열더니 '너, 꾀만 피우고' 야단을 쳐요. 어려서부터 한 거하고 隔?안 맞아서 몸이 이상하고 못 움직이겠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다음날 문화공보부에서 원로무용가들이 모여서 '이애주는 못 데려가겠다', 문공부에서는 '꼭 데려가시오' 그랬대요. 국문과에 편입했을 때라 정병욱(1922~1982) 선생님한테 의논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국문과 교수님들이 다 의논을 했다며 '다녀와. 그냥 문화를 보는 게 공부야. 가서 관객이 얼마나 들어왔나도 보고 표는 얼마 받나도 보고.' 가서 선생님 말대로 진짜 관객수랑 표값 조사를 했다가 기관에서 따라온 사람들한테 문공부 스파이로 몰렸다니까.(웃음) 24개국을 돌아다니면서 큰 공부했어요, 이탈리아 갔을 때는 평론가가 너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다 그러면서 왜 서양춤을 흉내내느냐 질문하는 거야. 군무 구도가 지금도 그래. 백조의 호수 같아. 12월 24일 돌아오면서 국립무용단도 탈퇴하고 무용계도 떠났어요. 그러면서 74년에 우리 춤의 정통을 살린 이애주춤판을 처음 열었지요. '땅끝'이라고. 그때도 배운 애가 무식하게 춤이 뭐냐, 판이 뭐냐, 비판 많이 들었어요. 무용은 식민지 표현인데. 무대를 넓힌 게 마당이고 마당을 우주적으로 넓힌 게 판이야. 이제는 그 말 당연히 쓰잖아. 내가 몇 십 년 전에 툭툭 치고 간 게 이제는 자리를 잡아서 정말로 후회가 없어. 84년부터는 춤패 신을 만들어서 '나눔굿' '도라지꽃'을 계속 내놓았지."
_그러다가 1987년 박종철의 죽음을 기리는 '바람맞이춤'이 시국춤의 시작이었지요.
"1월에 박종철이가 물고문으로 죽고 (함께 운동하던 이들이) 다 감옥에 가고 얘기할 사람도 없고 연습실도 풍비박산이 났고 내가 인간의 본성이 뭔가, 이걸 춤으로 이야기해보자, 생각이 들었어. 고문춤이 있나 찾아보니 춘향전에 춘향이 죽인다고 칼춤 춘 거 밖에 없더라고. 그 무렵 김민기 이상우 김석만 이런 사람들이 연우무대를 신촌에서 혜화동으로 옮기니까 누님이 개관공연을 좀 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 춤을 개관공연으로 하겠다고 마음 먹었어. 그때 전설의 상쇠잽이 김용배를 비롯해 이광수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마포에 있을 때거든. 자기네도 사물놀이 10주년인데 대찬성이라는 거야. 주제를 씨 물 불 꽃으로 잡아서 죽었던 이가 소생하는 걸 그렸지. 1주일 동안 유료공연을 하는데 사람들이 미어터져서 나중에는 돗자리 하나에서 춤을 췄어요. 그걸 보고 신부될 분이 공연 중에 이런 쪽지를 보냈어요. '명동성당 계단에 시민들이 농성하고 전경들이 쫙 깔렸는데 선생님 춤은 그 사이에서 춰야 되는데요.' 그 때 학생들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보여달라는 거야. 그래서 6월 24일쯤 한다고 다 알렸어. 그런데 하루 전에 김덕수 사물놀이에서 못한다고 연락이 왔어. 일본공연을 간다고 계약서를 다 썼대. 기가 막히지. 그건 장단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다음날 대학 춤패 한사위 회장하던 애들이 찾아왔어요. 이게 내가 81년에 서울대 교수가 되면서 만든 춤패야. 자기네가 배워서 하겠다고. 그래서 밤새 배워가지고 한다는 게 바로 26일 오후 1시에요. 내가 나가니까 본부에서는 평소라면 빌려주지 않던 극장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학생들이 밀쳐내고 공연이 시작됐어. 연우무대는 좁은데 춤사위가 딱딱 나가니까 한국일보 최규성기자가 (한반도 모양으로 펼친 춤사위를) 찍었잖아요. 그리고는 학생들이 에워싸고 거리로 나갔어요. 교문 앞에서 택시를 태워줘요. 맨발이라 발은 다 데고 절름거리며 약국에 가서 약을 사서 발랐어요. 집에 오니까 텔레비전에 막 나오면서 전국에..(그렁그렁)"
_서울대 교수인데, 그만 두라는 압력 같은 것은 받지 않았나요?
"민교협의 김진균 교수한테 나중에 전해들었어요. 본부에서 회의를 했는데 나를 건드리면 학생들이 가만히 안 있을 테니 안 본 것으로 하고 제재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협박은 말도 못하게 받았지. 대가 약했으면 정신이 이상해졌을 전화 편지 계속 보내는 거야."
_그게 88년부터 민중계열 춤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시는 계기가 됐나요?
"아니. 전혀. 그런 거엔 굴복을 안 하지. 88년에 남한 학생들이 임진각을 통해 북한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게 막히니까 성균관대학에서 범민족대회를 열었어요. 그때 나는 히로시마에 가서 평화공원에서 춤을 추고 일본 전역에서 온 애들을 가르쳐서 마지막 날에는 군무를 췄어. 진이 다 빠져서 왔는데 귀국하자마자 그걸 하라는 거야. 못한대도 꼭 해달래. 민중이라는 힘을 얻어서 우리 춤에 역동성을 회복시켰는데 싶으니 하자 했지. 그런데 공연 당일, 꼭 하라는 사람들이 아무도 안왔어. 자기네는 또 다른 일을 해야 한대. 나 혼자 뛰면서 공연하고 정리하고. 그래서 내가 선언했지. 이렇게 몸으로 안 뛰고 입으로만 하는 사람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 더 공부하고 힘을 길러서 보자. 그리고는 다시는 안 나간 거야. 그래서 10년 동안 승무에 매진해서 인간문화재가 됐잖아. 나는 민예총이 생길 때도 나 혼자 반대했어. 같은 사람끼리 조직만 커지면 뭐하냐. 몸은 움직이지 않고 이데올로기만 살아서들 움직이는 그런 건 안 좋아."
_정년퇴임하시면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이세요?
"싸이의 말춤이나 김연아의 스케이트, 손연재의 체조가 다 우리 춤의 역동성과 맞닿아 있어서 세계를 감동시키는 거예요. 김연아 피겨 하는 것 본 다음에 서양 사람들 피겨 하는 거 심심해서 못 보잖아요. 손 하나를 뻗어도 좍 이렇게 영원히 가거든요. 일시무종(無始無終)이 천부경의 핵심이고 우리 민족의 정신이기도 한데 끝이 다시 시작이다, 그게 몸으로 표현되는 거잖아요. 서양 현대무용에서 머스 커닝햄을 굉장히 쳐주는데 내가 그 사람 공연을 미국에 갔을 때 본 적이 있어요. 하우 투 워크, 하우 투 점프 하우투 턴(how to walk how to jump, how to turn) 어떻게 걷고 어떻게 뛰고 어떻게 돌고. 춤제목이 그거에요. 내복같은 걸 입고 무대에서 걷고 뛰고 그래요. 야, 머스 커닝햄이 살풀이만 알았으면 저게 달랐을 텐데. 우리 승무를 알았으면 진짜 다 아는 건데 아깝다 싶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춤이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거든요. 춤대학 하나 만들어서 정말 제대로 된 춤을 가르치고 싶어요. 숨쉬는 것부터 회음부 하단전에서 올라오는 깊은 숨을 훈련시키고 그게 몸을 일렁일렁 움직이는 게 춤으로 이어진다는 걸 가르치는 거지요. 진짜 우리 춤은 보여주는 춤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고 자유롭게 하는 춤이에요. 사유하는 춤, 관하는 춤, 그런 춤을 우리 후손은 물론이고 세계 만방에 배우러 오라고 하고 싶어요."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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