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엔 병원마다 인플루엔자(독감) 예방접종을 하려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그런데 흔히 백신은 뾰족한 주사바늘로 맞는 것만으로 알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956년 천연두 예방 백신을 보급한 이래 주사용 백신이 주종을 이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요즘은 별로 유행하지 않는 '구식 질환'을 막는 정도가 고작이라는 것이다.
최근 이런 선입견을 불식하는 백신이 대거 나왔다. 먹는 백신, 코에 뿌리는 백신 등 형태가 다양해진 것은 물론, 금연 백신과 암 치료 백신 등이 바로 그것이다. 1796년 영국 에드워드 제너의 천연두 백신을 시작으로 한 해 1억2,800만명의 생명을 구하는 '최종 병기'가 된 백신이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뿌리고 바르고 먹는 백신 나와
가장 단순한 백신의 변화는 주사기 바늘을 겁내는 어린이들을 위한, '바늘을 쓰지 않는' 어린이용 백신의 등장이다. 가장 흔한 형태는 먹는 백신으로, 영ㆍ유아용 로타바이러스 백신이 대표적. 로타 바이러스는 5세 이하 어린이에게서 심한 설사를 유발하는 가장 흔한 바이러스다. 이를 예방하려면 생후 2개월부터 1, 2개월 간격으로 2, 3회 투여하는데, 먹는 백신은 갓난아이 몸에 바늘을 찌르는 게 내키지 않은 부모에게 환영 받고 있다.
A형 간염 예방 백신도 식품 형태로 개발됐다. A형 간염은 주로 소화기계를 통해 감염돼 식품 백신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과 경희대 연구팀이 원예작물의 유전자를 변형해 담배와 토마토에서 A형 간염을 예방하는 항원 단백질을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감자, 토마토, 바나나, 벼, 담배, 옥수수 등을 이용해 먹는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먹는 백신 외에 코에 뿌리는 스프레이 백신도 나와 있다. 2010년 녹십자가 출시한 '플루미스트'는 코에 뿌리기만 해도 인플루엔자를 예방해 준다. 이 약은 미세한 입자로 만든 백신이 코 내부 점막을 통해 인체에 직접 흡수되는 원리다.
암과 알츠하이머병 치료까지
형태만 다양해진 게 아니다. 최근 백신이 질병 예방뿐만 아니라 암과 노인성 치매(알츠하이머병), 당뇨병 등 난치병 치료까지 보폭을 넓히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뇌의 독성 단백질인 '베타 아밀로이드'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뇌 조직에 쌓인 베타 아밀로이드가 신경세포 사이의 신호교환을 막아 기억과 기분, 행동을 교란시키기 때문인데, 최근 이를 제거하는 백신이 개발됐다. 3상 임상시험이 끝나는 2, 3년 뒤쯤 유럽에서 출시될 예정이다.
미국에서는 담배를 끊게 도와주는 금연 백신이 개발됐다. 이 백신은 니코틴이 뇌에 흡수되는 것을 차단하고 흡연충동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유전정보 전달 바이러스를 포함한 백신이 핏속에서 니코틴 분자를 중성화해 뇌로 니코틴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이제 백신 연구는 감염성 질환 예방을 넘어, 암과 중추신경계 질환, 대사성 질환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암 예방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암 예방 백신의 원리는 암 항원(암세포 표면에서 발현되고 체내 면역체계가 이물질로 인식하는 물질)을 인식하고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면역체계를 길들이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 암 예방 백신은 자궁경부암 백신으로, 다국적 제약사 GSK의 '서바릭스'와 머크의 '가다실'이 나와 있다.
조만간 전립선암 예방 백신(프로벤지)도 상용화될 전망이다. 프로벤지는 몸 속에 잠자는 전립선암 공격 세포를 깨우는 백신으로, 현재 미국 바이오회사인 덴드리온이 임상시험 중이다. 임상 시험 결과, 백신을 접종한 전립선암 환자의 수명이 4~26개월 연장됐다.
이 밖에 헬리코박터균을 이용한 위암 백신과 난소암, 악성 흑색종을 치료하는 백신, 비소(非小)세포성 폐암 치료백신 등 치료용 백신이 개발되고 있다.
한 번 접종으로 여러 질환 막아
한 번 접종해 2가지 이상 질병을 예방하는 '콤보백신'도 등장했다. 여러 백신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뭐 대단한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각 백신은 물리적 특성이 달라 하나로 섞으면 약효가 떨어질 수 있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노피아벤티스의 '테트락심'과 GSK의 '인판릭스' 등이 대표적인 콤보백신이다. DTaP 백신(디프테리아ㆍ파상풍ㆍ백일해 예방 백신)과 소아마비를 막는 폴리오 백신을 합쳐 한 번에 4가지 질병을 막아준다.
백신 제조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미국 와이어스가 개발한 단백 접합 기술이 일례다. 단백 접합 기술이란 서로 다른 균주의 세포막에 있는 다양한 다당질을 단백질 운반체와 결합하는 것이다. 폐렴구균 백신에 적용돼 영ㆍ유아 폐렴구균 질환 감소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 화이자제약은 단백 접합 기술을 적용해 13가지 균을 막는 '프리베나 13'을 선보였다. 이환종 서울대 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요즘의 백신 연구는 난치병이 처음부터 발원하지 못하게 원천 봉쇄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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