밋 롬니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선거운동기간 동안 자신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비슷하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무리한 전쟁과 엄청난 전비 투입, 엉망이 된 경제, 국론의 분열 등 부시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우는 것을 막으려 했다. 8월말 플로리다 템파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 부시가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정도다.
롬니 후보는 그러나 6일 치러진 미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었다. 최대의 박빙 승부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경합주 대부분을 내주며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완패했다. 그가 얻은 선거인단은 206명에 불과해 오바마의 332명과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였다.
이번 선거 결과는 오바마가 좋아서라기보다 롬니에 대한 불안감 내지는 경계심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바마 1기는 두드러진 성과를 많이 내지 못했다. 8% 아래로 겨우 떨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7% 후반대에 머물고 있는 실업률은 오바마 1기의 경제 성적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오바마 1기는 국제관계에서도 미국인과 세계인이 품었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니가 오바마를 이기지 못한 것은 그가 겉으로 피하고 싶어하는 척 했던 부시 체제를 답습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롬니는 세금을 인하하고 친기업과 탈규제를 약속했다. 불공정무역에 대한 보복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가혹하게 때렸다. 나약한 정책이 미국을 위축시켰다며 '강한 미국'을 천명했다. 부시 때와 닮은 정책들로 이미 효과가 없다고 입증된 것들이다. 물론 그가 1차 TV 토론 등을 거치며 중도적 태도를 일부 보이긴 했지만 그것이 롬니 체제의 근본을 바꿀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롬니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도 백인, 부유층, 남성에 어필하려 했다. 이들은 유색인종, 가난한 사람, 여성에 대한 우월감을 상징한다. "진짜 강간은 임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강간에 의한 임신도 신의 뜻"이라는 공화당 의원들의 발언은 남성 우월주의의 또다른 표현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교훈은 착오적 대결주의와 그 바탕에 깔린 근거 없는 우월주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는 점이다.
롬니를 거부한 주요 세력은 여성, 젊은 층, 흑인 및 히스패닉 등이었다. CNN 방송 등의 출구조사에 따르면 여성 유권자의 55%가 오바마를, 44%가 롬니를 선택했다. 52%가 롬니를, 45%가 오바마를 선택한 남성과는 다른 경향이었다. 젊은 층도 오바마 편이었다. 18~29세 유권자는 60%, 30~39세 유권자는 55%가 오바마를 찍었다. 흑인은 93%, 히스패닉은 71%가 오바마를 뽑았다. 아시아계의 오바마 지지율도 70%를 넘는다.
이들을 절대적 약자 혹은 소수자라고 부르는 게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상대적 약자라고는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만든 것이다. 일부 언론은 이들이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 비해 더 적극적이고 더 절실한 마음으로 투표에 임했다고 분석한다.
미국 대선의 또 다른 교훈이 여기에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근거 없는 허위 관념을 배격하고 자신의 계급 혹은 사회적 지위를 자각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 행위에 참가할 때 정치와 세상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국의 유권자에게도 적용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박광희 국제부장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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