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거 같아. 다 내 자식 같아서 오지 않을 수가 없어."
이한주(66)씨의 '자식사랑'은 남다르다. 그는 일과 중에도 자투리 시간을 내 서울 서초구 원지동에 위치한 대원농장을 찾는다. 올 9월 9.9㎡ 면적의 땅에 모종을 심으면서 연을 맺은 자식들(배추 30포기ㆍ김장무 20개)이 잘 자라는지 살피기 위해서다. 2002년에는 이 자식들 때문에 월 전화비가 82만원 나온 적도 있다. 네덜란드 출장이 갑자기 1주일에서 15일로 길어졌기 때문. 늘어난 일정 탓에 그는 작물에 물주는 것을 부탁하느라 연일 통화해야 했다.
이씨는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7년부터 농사를 지었다. 당시 그는 중소건설사를 운영했다. 이씨는 그때를 "사람에 대한 실망이 컸던 시기"라고 기억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돈을 떼이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탓이다. "농작물은 내가 정성 드린 만큼 자라잖아. 거짓말도 안 하고…." 사람에 대한 실망감을 다스리려 시작한 농사는 삶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다. "예전엔 독선적이었지. 혼자 똑똑한 척 다하고, 내가 제일인 줄 알았어. 근데 농사는 서로 돕는 거잖아. 농사 짓다 보니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더라고." 야채 위주로 식단을 바꾸면서 건강도 좋아졌다.
그는 "농사는 땀 흘리며 깨닫는 심신치유의 시간"이라고 했다. "10일 뒤면 배추를 수확한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선 행복과 함께 여유도 묻어났다. 수확한 배추는 김장에 쓰고, 집 주변 파출소나 거래은행에도 가져다 줄 생각이다.
현재 이씨처럼 전국적으로 도시텃밭이나 주말농장에서 직접 작물을 기르는 'GIY(Grow-It-Yourself)족'은 76만6,000명. 서울의 경우 1992년 1만6,500㎡이던 도시농장 총 면적은 올해 62만1,472㎡로 20년 사이 37배 늘었다. 대원농장 대표 김대원(59)씨는 "1989년 처음 시작할 땐 회원 수가 3명이었지만 지금은 1,5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주말농장이 "가족과 함께 하는 여가 공간"으로 인식되면서 농사가 '생업'에서 '생활'로 진화하는 셈이다. 최근엔 이런 분위기를 나타내는 '애그리테인먼트(agritainment)'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농업(agriculture)과 여흥(entertainment)을 합친 말이다. 경기 파주, 화성에는 텃밭 딸린 주거 단지도 조성 중이다.
학교나 주민센터 옥상엔 '옥상농원'이 생겼다. 서울 양천구 신정1동의 양명초등학교도 옥상농원을 운영하는 곳 중 하나. 회색 콘크리트 아파트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교실 3개 크기(198㎡) '판도라 농원'은 초록색 숨결을 내뿜고 있었다.
박준수(13)군은 쉬는 시간이면 '배송이'를 보러 판도라 농원으로 향한다. 배송이는 박군이 9월 심은 배추의 이름. 배추와 송이, 두 단어를 한데 엮었다. 박군은 "여자 이름(송이)을 붙이면 좋을 거 같아서"라며 얼굴을 붉혔다. 박군은 아직 여자 친구가 없다. 1학기 때 "빨간 게 맛있을 거 같아" 기른 방울토마토에서 먹거리의 소중함도 배웠다. "예전에는 음식도 많이 남겼어요. 그런데 농부 아저씨들이 힘들게 농사짓는지 알게 되니까 지금은 반찬투정도 안 하고, 맛있게 잘 먹어요."
판도라 농원을 찾은 아이들은 신이 나 떠들었다. 김성현(12)군이 방금 따온 배춧잎을 내밀며 말했다. "한 번 드셔 보세요. 이전엔 몰랐는데 뿌리 부분은 달달하고, 잎은 고소해요." 선수빈(13)양은 "기른 작물을 따다가 급식 때 함께 먹어요. 너무 맛있는데, 치커리는 너무 써요"라고 했다. 판도라 농원의 손님 무당벌레, 벌, 배추잎나비를 보는 건 소소한 재미다.
이 학교의 4~6학년생 272명은 각자 화분 하나씩 갖고 있다. 1학기에는 상추ㆍ고추ㆍ방울토마토ㆍ오이ㆍ가지ㆍ치커리를 재배했고, 2학기엔 배추ㆍ무를 심었다. 김영기 교장은 "친구 화분에도 물을 주면서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등 인성교육에도 좋다"고 했다.
농업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관련 제도를 마련하는 추세다. 올해를 '도시농업 원년'으로 선포한 서울시는 이달 1일 '도시농업의 육성 및 지원 조례'를 발표했다. 농지 확보와 안전한 농산물 생산을 위한 친환경농법 보급이 주 내용. 내년도 예산에 옥상 텃밭과 학교농장 조성을 위한 23억원도 책정했다. 부산, 대구, 대전, 수원 등 전국 16개 지자체도 비슷한 조례를 제정했거나 준비 중이다. 정부 역시 지난 5월 발효한 도시농업육성지원법을 토대로 관련 정책을 수립한다는 계획이다. 이한호 서울시 농업기술센터 소장은 "도시농업은 삭막한 도시생활에 지친 삶을 '힐링'하는 역할도 있어 앞으로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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