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어렵고 책임은 막중하고 불때기의 추억엔 신산함이…
연기 줄인 개량아궁이 등장… 귀농자 중심으로 찾는이 늘어
물질적 편리함에 밀려난 정서적 온기가 그리운 탓이리라
서러운 새색시가 가장 좋아하던 자리가 아궁이 앞이다. 이글이글 잉걸불이 익도록 친정 생각에 젖을 수도 있고, 꾸벅꾸벅 졸 수도 있다. 타닥타닥 터지는 장작 소리에 묻어 소싯적 부르던 노랫가락이 흥얼거려질 때도 있고, 어쩌다 찔끔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 시집 식구 눈에 띄더라도 매운 연기 탓으로 얼버무리면 그만. 애먼 부지깽이만 더 바빠진다. 아랫목이 뜨듯해지려면 족히 두어 시간은 걸린다. 저녁 밥상 거두고도 한참을 아궁이 앞만 지키고 앉은 각시가 야속하지만 서방은 어른들 흉볼까 봐 큰 소리로 부르지도 못한다. 그러다 지치면 뒷간에라도 가는 척 방문을 나서고, 어린 부부의 불장난이 시작된다. 이불 속에서도 서로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수줍게, 숫접게 나누기도 하는 곳이 아궁이 앞이었다. 장작이야 아까웠겠지만 어른들도, 어지간하면, 그 자리는 모른 척해줬다고 한다.
불 때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건 때본 사람은 안다. 불쏘시개가 변변찮으면 불 붙이기조차 만만찮고, 덜 마른 장작이라면 연기만 자욱해지기 일쑤. 간신히 키운 불도 잘못 쑤시면 금세 스러진다. 장작을 처음부터 너무 깊이 넣어도 안 되고 들머리에서만 계속 태워도 안 된다. 아랫목에 일찌감치 좌정한 어른들의 성화에 마음은 다급한데 불쏘시개 다 태우도록 불은 시원찮고…, 새색시는 머뭇머뭇 남편의 구원을 요청한다. '저기요~' 미덥지 않던 서방이 모처럼 근사해 보이는 곳. 불길은 신랑의 위신처럼 치솟는다. 아궁이는 불의 문이고, 겨우내 나눌 집안의 온기가 처음 맺히는 자리다.
아궁이에서 지펴진 불길이 지나는 길이 '고래'다. 고래의 경로는 또아리 튼 뱀처럼 구불구불 굽이쳐 아궁이보다 높은 연통과 굴뚝으로 이어진다. 불기가 위로 솟는 이치를 따라 고래는 얕은 오르막 경사를 따라 놓이고, 그 출발점인 아궁이는 그러므로 집의 가장 낮은 자리에 열리기 마련이다. 고래 중간중간에는 '개자리'라 불리는 상대적으로 너른 빈 공간이 설치된다. 불기가 모여 잠시 머물면서 쉬거나(재연소) 굴뚝으로 빠져나가기 전 습기를 재우기 위한 자리다. 새벽녘 불이 식으면 강아지들이 고래를 따라 들어가 거기서 겨울 밤을 지냈고(그래서 개자리일까), 집에 사람이 있는 한 아궁이 문이 닫히는 일은 없었다.
구들 난방의 관건은 위로 치솟고 바깥으로 도망치려는 불을 붙들어 눕히고, 미리 깔아둔 불의 길(고래)을 따라 안으로 고요히 흐르게 하는 기술이다. 너무 급히 흘러도, 너무 더디게 흘러도 안 된다. 급하면 열기를 전하지 못하고, 더디면 역류하기 때문이다. 제 열기를 충분히 내준 뒤 굴뚝을 타고 올라 사라질 만큼의 힘만 남긴 열기는 연기도 그을음도 없이 대기 속으로 흩어진다. 불의 장인들이 구들이나 화덕을 놓을 때, 고래 깔고 개자리 놓고 구들장 얹은 뒤 맨 마지막에 솜씨를 자랑하는 곳도, 사소한 실수를 미조정해 바로잡는 곳도 아궁이였다.
불의 장인들이 강조하는 첫 단계는 예열이다. 아궁이 안, 그러니까 연소실이 데워져야 공기(산소)를 빨아들이는 힘이 생기고, 불을 살릴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종이나 불쏘시개는 장작에 불을 붙이는 재료가 아니라 연소실의 공기를 달구는 재료인 셈. 부채나 입김으로 연기의 방향을 잡아 역류하지 않게 하는 것도 이 단계에서 해야 할 일이다. 잔가지 불쏘시개에 불이 충분히 붙으면 팔목 굵기의 장작을 넣어야 한다. 너무 굵은 장작은 연기만 나고 불완전연소하기 십상. 불이라고 다 같은 불이 아니어서 열기가 소화해낼 만한 장작을 순차적으로 넣어야 하고, 하나하나의 장작도 타는 부분과 가열 건조되는 부분, 아직 타지 않은 부분을 살펴 조금씩 아궁이 깊이 밀어 넣어야 완전히 태울 수 있다. 이 과정을 (김성원 지음)이란 책에는 이렇게 소개한다. "밑불에 의해 나무가 가열되면서 나무 안의 습기가 증기로 방출된 후 나무가 적당히 건조되어 나무가스가 발생하고 여기에 불이 붙고 고온의 숯이 생기고, 이 숯층을 통과하면서 다시 나무가스가 산소와 결합해서 불꽃이 생기고 이산화탄소가 일산화탄소로 변환되면서 연소되는 일체의 연소과정이 너무 빠르지 않게 순서에 맞게 일어나도록 하면 깨끗하고 완전한 고온연소가 일어납니다."
나무가 불을 만나면 열분해가 시작된다. 조직이 풀리면서 먼저 수분을 수증기로 배출하고, 휘발성 나무기름이 끓으면서 나무의 연소가스를 뿜어낸다. 불이란, 엄밀히 말하면 나무가 타는 게 아니라, 150도 이상의 고온으로 달궈진 나무가 토해낸 나무가스와 엉긴 나무기름의 그을음(tar)이 산소와 함께 타는 것이다. 나무는 탄소(50%)와 산소(44%), 수소와 무기질(6%)로 이뤄져 있으며, 가장 뜨거운 열을 내뿜는 숯은 휘발성 물질을 방출한 탄소덩어리다. 재로 남는 것은 산화칼슘, 망간, 규사 등 무기질이다. 완전연소는 불꾼들의 꿈이다. 좋은 불꾼은 불을 지피는 속도나 불꽃의 크기가 아니라 꺼진 불자리, 타고 남은 재의 부피로 제 솜씨를 뽐낸다.
불을 만들고 다루는 것은 저렇듯 정신의 영역, 과학의 영역일지 몰라도, 불을 바라보고 누리는 것은 아무래도 영혼의 영역, 몽상의 영역이다. 새색시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아궁이 앞에 머무는 것은 추운 날의 흥감한 온기 못지않게 불꽃 자체의 모호하고 신비로운 시각적 마력 탓도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가 불꽃이 지닌 물질적 상상력의 4요소 가운데 하나로 불을 꼽으면서 "불꽃은 우리에게 상상할 것을 강요한다"고 할 때, 하다못해 모닥불 앞에라도 오래 머물러본 이라면 '강요'라는 저 단어의 자리가 얼마나 적확한지 안다. "불꽃 앞에서 꿈꿀 때, 사람이 상상한 것에 견주어 본다면 사람이 인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불꽃은 그 은유와 이미지의 가치를 매우 다양한 명상의 영역 안에 두고 있다. (…) 불꽃의 몽상가는 모두 잠재적 시인이다."(에서)
고독하게 홀로 타면서 혼자 꿈꾸는 촛불이 짝사랑의 이미지라면, 아궁이 속에서 이글거리며 서로를 휘감는 불꽃은 역시 바슐라르가 에서 언급한 원초적 충동적 사랑(노발리스 콤플렉스)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스스로를 태우며 빛을 발하는 불꽃은 제의(祭儀)의 불꽃이고, 파괴와 재생과 정화의 불꽃이기도 하다. 불의 힘으로 신이 되고자 만년의 육신을 에트나 화산 속에 던졌다는 저 고대희랍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욕망도 그 앞에서는 공감하기 어렵지 않다.
취사와 난방에 아궁이를 쓰는 가정은 드물다. 60년대 말 석유풍로와 난로가 등장했고, 70년대 중반부터는 집집마다 가스레인지가 생겼다. 불꽃 없이 음식을 데우는 전자레인지나 전기플레이트를 쓰는 집도 흔하다. 나무 화덕이나 부뚜막 딸린 전통 아궁이는 민속마을이나 오래된 동네의 한옥 관광숙소에나 남아있고 불을 피우는 것도 캠핑이나 가야 경험할 수 있게 됐다. 버튼 하나면 점화와 소화, 온도 조절에 예약난방까지 되는 편의성에 대자면 아궁이 앞에서의 노고와 나무 조달의 번거로움은 실감하기 힘든 옛이야기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게, 김성원씨의 책 제목처럼, 귀농자들을 중심으로 화덕과 구들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열효율을 높이고 연기를 대폭 줄인 개량형 구들 아궁이가 실외나 부엌이 아니라 거실로 진입해 황토방을 데우고 벽난로처럼 운치까지 선사한다고 한다. 이중구들의 대가로 꼽히는 이화종씨의 라는 책에는 구들 온기 자랑과 누리는 행복이 넘쳐난다. 한 마디로 예전의 그 심란하고 신산하던 아궁이 노동은 잊고 뜨듯한 아랫목 온기만 생각하라, 건강에도 좋고 자연친화적인데다 경제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말처럼 정말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궁이를 껴안고 지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의 환기만으로도 마음이 데워지는 듯하다. 곧 닥칠 추위 앞에서 어쩌면 우리는 물리적 온기보다 정서적 온기를, 물질적 편의 못지않게 잠깐이나마 귀하게 누릴 수 있는 아늑한 여유를 더 간절히 원하는지 모르겠다. 아궁이는 그런 공간이다.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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