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진 지음
푸른역사 발행ㆍ470쪽ㆍ2만8,000원
백설공주의 계모는 왜 백설공주를 죽이려 했을까.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는 질문에 거울은 늘 ‘당신’이라고 말해줬지만, 끝내 떨칠 수 없었던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국문학자 장세진(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의 신간 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해방 후 한국이 미국이라는 표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백설공주 계모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을 자기 확신과 열등감의 충돌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한의 자기정체성 형성 과정을 미국을 매개로 추적한 책이다. 부제는‘1945년 8월 이후 한국의 네이션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이다. 여기서 ‘네이션’은 국가와 민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왜 미국인가.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미국이라는 거울이 미친 거대한 영향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해방과 함께 해방군이자 점령군으로 미군이 이 땅에 상륙한 이래 지금까지 미국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준거로 남아 있다.
그동안 이 주제의 연구는 주로 사회과학 쪽에서 이뤄졌고, 이때 초점은 ‘제도’로서의 미국이다. 반면 이 책은 문화적 측면으로 방향을 돌려‘상징’으로서‘상상된’ 미국, 그리하여 ‘우리 안에 내재화한’ 미국의 기원을 추적한다.
최근 를 통해 ‘우리에게 아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저자가 이번에는 ‘우리 안의 미국은 어떤 모습으로 들어왔는가’를 묻는다. 그 과정에서 선망과 반발이 교차하면서 일어난 역동적인 현상을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둘러싼 담론과 지식인들의 발언,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분석을 해나간다. 다루는 시기는 해방부터 4ㆍ19까지이고, 1950년대를 특히 비중있게 다룬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글로벌 타자인 미국을 상상했고, 미국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어떻게 우리 스스로의 이미지를 그리며 미래를 설계해왔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초점은 일제 식민 시기와 해방 후 탈식민 시기 정체성의 역사적 구조에 나타나는 ‘반복’과 ‘차이’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 ‘동양/아시아’에 대한 관점은 해방 후에는 아메리카를 매개로 해서 많은 부분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났다.”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무력할지언정 문화적으로는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서양/아메리카’를 상대로 옮겨가면서, 열등감과 자학에 가까운 자기 표상 방식이 여전히 되풀이됐다는 것이다.
동시에 불연속성도 나타나는데, 해방 후 남한의 자기 정체성 형성 과정에 나타나는 결정적인 차이로 저자는 반공주의적 경향을 지적한다. 일제 시기와 해방 공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좌파적 담론이나 상상력이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는 공식적으로 또한 내면적으로 거의 추방됐다. 냉전 구도 속에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반공주의에 균열이 생긴 것은 4ㆍ19를 전후한 혁명적 담론 공간에서다. 반공의 이름으로 민족과 국가를 구성하던 원리가 힘을 잃으면서 ‘동양/아시아’는 진정한 탈식민의 기표로 거듭날 기회를 얻었지만, 5ㆍ16으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개발’을 앞세워 ‘민족/국가’ 담론을 전유하면서 다시 위축됐다는 것이다. 아시아 피식민의 역사를 공유한 베트남에 남한 정부가 대규모 파병을 한 것은 그 정점이다. 식민의 기억을 지우려는 의식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거듭 되살아나 작동하는 식민적 의식의 충돌을, 저자는 꼼꼼하게 분석해서 보여준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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