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업체에서 3D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이대현(30)씨의 하루 일과는 화장으로 시작된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씻은 다음 스킨→수분크림→선블록 순으로 바른다. 마치 미용실에서 방금 나온 것 같은 그의 헤어스타일 역시 집에서 손수 멋을 낸 것이다. 퇴근 후엔 하루 종일 피곤해진 얼굴피부를 에센스로 촉촉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씨의 화장품은 여러 브랜드다. 스킨, 크림, 에센스 등 각 제품을 브랜드 별로 일일이 써본 후 자신의 피부에 가장 적합한 브랜드를 각 제품별로 골라 쓰기 때문이다. 단정하면서도 독특한 색상의 재킷과 셔츠, 바지 역시 백화점, 가두점, 동대문, 온라인 몰 등 다양한 곳에서 산 제품을 적절히 매치해 연출한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 20~30대에선 가히 '꾸미는 남자'열풍이다. 이른바 그루밍(grooming)족. 지난해 한국 남성들이 구매한 스킨케어 제품(스킨, 로션, 크림 등 기초화장품)은 5,500억원(약 5억달러)에 달했다. 유로모니터 집계에 따르면 이는 전세계 남성 화장품 매출액의 21%를 차지하며, 금액으론 세계 1위다. 유로모니터는 "한국은 성인 남성 인구는 1,900만명 밖에 되지 않지만 남성 스킨케어 시장 규모는 세계에서 가장 큰 특이한 국가"라고 평했다. 극심한 불황 속에서도 헤라 옴므.오딧세이(아모레퍼시픽), 보닌.오휘포맨(LG생활건강) 등 국산 브랜드는 물론 SK Ⅱ맨, 비오템 옴므, 랩 시리즈 같은 글로벌 남성용 브랜드까지 한국시장에선 일제히 선전하고 있다.
AP통신은 "남성들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갔다 오는 나라에서 화장품이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것은 놀랍다"고 평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부분 남성들은 군대에서 피부관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자외선에 노출되고 땀도 많이 흘리기 때문에 관리를 하지 않으면 피부가 나빠진다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병사들끼리 서로 제품정보를 교환하고, 휴가를 나오면 좋은 화장품을 사 가는 일도 이젠 자연스럽다. 때문에 많은 화장품 업체들이 군인용 위장크림을 출시하고 부대에서 피부관리 체험 이벤트 등을 개최하는 등 '군인 마케팅'을 펼칠 정도다.
대체 이들은 왜 화장을 하는 걸까. 갑자기 우리나라 남자들의 DNA가 바뀐 것일까.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외모도 경쟁력이 된 세태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실제로 취업 면접을 앞둔 20대 후반 남성들이 외모 가꾸기에 가장 적극적이다. 50대 이상 장년층도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늙어 보이면 조기 퇴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의 발로라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정작 꾸미는 남자들은 다르게 얘기한다. 경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기가 무엇이든 일단 외모 가꾸기를 시작하면 변화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감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꾸미는 남성들은 피부관리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과식이나 술 담배를 꺼리고 꾸준한 운동으로 식스 팩까지 가질 만큼, 매사 자기 몸 관리에 철저한데 이를 통해 더 당당해지고 더 행복해진다는고 이들은 주장한다.
한 남성화장품 업체 관계자는 "미에 대한 동경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우리나라 남자들은 전통적인 남성관 때문에 이런 욕망을 억눌러 왔다"면서 "꽃미남이 우상이 되고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크게 깨지면서 남성들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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