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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근원과 고독에 대한 성찰… 12년 만에 만난 한강,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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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근원과 고독에 대한 성찰… 12년 만에 만난 한강, 여전하다

입력
2012.11.0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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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내면의 표현 수단을 잃어버린 이들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화가, 말하거나 글을 쓸 수 없는 지식인, 듣거나 보지 못하는 예술가. 인물들은 감각과 표현수단을 잃어버림으로써, 타인과의 소통은 물론 자기 자신의 생각마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완전히 달라진 내면을 갖게 된다. 하지만 다시, 타인에게 내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표제작 '노랑무늬영원') 고 전할 길을 잃어 방황하고, 인간관계는 뒤틀린다. 인물들은 이 결핍을 반복하며 한줄기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다시 이 깨달음을 표현할 소설적 수단이 없는 바, 소설 속 인물들의 깨달음은 행간의 여운과 사건의 정황으로서만 전달된다.

줄거리나 주제를 요약해 '한강의 소설이 무엇이다'고 단정지어 소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강의 소설은 사건의 정황과 인물들의 감정선, 문장의 리듬을 따라가야 겨우 가 닿을 수 있는 이야기다.

2000년 이후 12년 만에 낸 세 번째 소설집은 작가가 2002년 여름부터 일곱 달에 걸쳐 쓴 표제작을 포함해 7편의 중ㆍ단편을 엮었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자동차 사고로 손을 못쓰게 된 서른세 살의 화가 현영. 작가의 소설에서 즐겨 등장하는 직업의 여자다. 주인공 현영은 어느 새벽, 자동차를 운전하다 길에서 개를 만나고, 개를 살리려 핸들을 꺾던 중 차가 전복돼 왼손을 다친다. '뭉개진 왼손'은 물론이고 회복과정에서 오른손 관절까지 망가지는 바람에 더 이상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오랜 간병과 수발에 지친 남편은 '인내와 짜증, 자제된 적개심'과 '무관심, 의무, 조용한 위선'으로 현영을 대한다. 작가는, 전부라 믿었던 그림을 포기하고 삶을 견뎌내는 이 인물의 일상을 예민하게 그린다.

'이렇게 더 작아져 간다. 더 지워지고 뭉개어진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뭉개어지는 데 비례하여 오히려 감각들은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회칼처럼 예리해진, 예전에는 가져본 적 없었던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혀의 감각들을 느낀다.'('노랑무늬영원' 부분)

'공포와 후회, 수치, 분노, 원망, 증오, 억울함, 비참함, 살의'로 범벅된 여자에게 한줄기 빛이 날아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집에서 친구의 어린 아들이 기르는 도마뱀 '노랑무늬영원'을 목격한 것. 사고로 잘려나간 도마뱀의 앞발에는 새 발이 돋아나고 있었다. 얼마 뒤 현영은 손가락으로 붓을 잡는 대신 손바닥 전체에 노란 물감을 묻혀 한지에 찍는다.

소설집은 이 밖에도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왼손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 남자(단편 '왼손'), 언니의 죽음 뒤에야 생전 불화했던 일을 후회하는 여자(단편 '회복하는 인간') 등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과 고독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작가 한강이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치열한 고민, 절제된 문장, 서늘한 감성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값하는 작품집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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