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들 사이에서는 숫자 20 때문에 운명이 갈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퉁퉁 붓고 아픈 관절이 최소한 20개는 돼야 최신 치료법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뿐 아니라 의사들도 이 숫자 20 때문에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은 관절을 싸고 있는 막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해 점차 주위의 연골과 뼈로 퍼지면서 관절이 파괴되는 병이다. 처음에는 아프면서 잘 움직이지 못하다 심해지면 아예 관절이 변형되기도 한다. 통증을 줄여주고 염증을 가라앉히는 약(항류마티스제제)을 먹다 잘 듣지 않으면 염증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을 억제하는 주사(생물학적제제)를 쓴다.
항류마티스제제보다 최신 약인 생물학적제제는 너무 비싸다. 한 달 치가 300만원 가까이 된다. 한번 발병하면 수년은 지속되는 이 병의 특성 때문에 치료를 오래 받아야 하는 환자들로서는 건강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면 거의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건강 보험이 적용되면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 약값은 10~20%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생물학적제제를 보험 혜택을 받고 쓰려면 붓고 아픈 관절(활성관절)이 20개 이상이어야 한다. 그 정도로 병이 심한 경우에만 보험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환자가 아무리 아프다고 호소하고 제대로 걷지 못해도 일단 의사는 활성관절 수부터 세어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많은 관절 가운데서 정확히 어떤 관절은 부었고 어떤 관절은 안 부었는지를 일일이 가려내기란 병원에서도 쉽지 않다는 것. 의사에게 주어진 진료 시간이 짧고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국내 의료 현장에선 더욱 그렇다. 게다가 같은 수의 관절이 부었어도 염증이 생긴 정도나 환자가 느끼는 통증은 천차만별이다. 활성관절 수만이 류마티스 관절염의 심한 정도를 가리는 의학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한림대성심병원 류마티스내과 김현아 교수는 "외국에선 대부분 활성관절 수뿐 아니라 염증 수치, 통증 정도 등 다양한 요소를 함께 적용해 류마티스 관절염의 심한 정도를 평가한다"며 "우리나라는 10여 년 전 호주의 기준을 그대로 도입해 아직까지 쓰고 있는데, 정작 호주는 이미 기준을 바꿨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교수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일본의 생물학적제제 사용권고 기준을 만족하는 환자 중 우리나라 건강 보험 적용 기준에 부합하는 경우는 각각 4.9%, 0%, 12%에 불과했다. 똑같이 아파도 국내에선 최신 약을 못 쓰고 외국에선 쓰는 셈이다.
가뜩이나 재정 여유도 없는데 보험 기준이 엄격해야 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엄격하기에 앞서 최소한 의학적으로는 타당해야 한다.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를 보는 한 의사는 "약(항류마티스제제) 써도 잘 듣지 않는 환자는 활성관절이 20개가 안 되도 대충 넘는다고 기록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며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는데, 비현실적인 기준을 들이대며 치료 못 해준다고 돌려보내야겠느냐"고 반문했다. 결국 의학계의 현실과 동떨어진 보험 기준이 의료 현장에서 꼼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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