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 투표시간 연장이 커다란 논란이 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주로 보수정치권에 의해 자행된 '투표자 억압' 행위가 선거기간 내내 논쟁거리였다. '투표자 억압'이란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벽을 높이는 일을 말한다. 설마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그런 일이 있을까 하겠지만, 투표자 억압행위는 눈에 거슬릴 정도로 뚜렷하게 진행되었다.
예일대 데이비드 블라잇 교수와 다수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공화당은 미국의 23개 주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투표자 신분증 검사법과 조기투표 일정 단축 등을 통해 노동자 계층과 소수인종 투표자들이 투표를 하기 곤란하게 만들었다. 블라잇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실린 칼럼에서 공화당원들은 어렵게 법을 만들어 투표를 방해하지말고, 차라리 유권자들에게 돈을 주어 투표장에 가지 말라고 하는건 어떻겠느냐고 힐난했다. 가뜩이나 미국은 우리나라와 같은 자동투표자격 부여제도가 아니라 사전 투표자 등록을 거쳐야 하는 실정인데, 투표당일 운전면허증, 여권과 같은 사진이 부착된 정부발급 증명서를 보여야만 투표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투표율을 낮추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언론에 따르면 흑인의 25%와 남미계 미국인의 16%가 여권도 운전면허증도 갖고 있지 않으니, 신분증 검사 강화는 투표에 장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수십마일을 운전해서 투표장에 가야하는데, 사진이 딸린 신분증이 없다고 투표를 거절당하면 과연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겠는가.
다행히도 미국에는 조기투표 제도가 광범위하게 활성화되어 있다. 그런데 선거때 지지정당이 자주 바뀌는 이른바 '스윙 스테이트'인 오하이오와 플로리다 주의 경우 일요일을 조기투표 지정일에서 제외시키려다 법원의 제지를 받았다. 그러한 시도가 나타난 이유는 흑인 등 소수자 거주지역의 교회가 기도를 마치고 함께 투표하지 못하게 하고, 주중에도 바쁘게 생업에 종사하는 노동계층의 투표를 방해하려는 데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일부 주에서는 투표 당일 유권자 등록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투표자 억압'을 정당화하기위한 논리는 '투표사기'의 방지다. 남의 신분증을 갖고 신분을 속인채 투표를 하는 경우는 미국에서 거의 있을 수 없음에도, 폭스뉴스는 투표일 당일에도 '투표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감시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부각시켰다. 2000년 대선에서 아직 개표결과도 확정되지 않은 플로리다주에서 부시의 승리를 선언했다가 공식사과를 했어야 했던 폭스가 이번에는 '투표사기' 논란을 통해 선거과정 자체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도 투표시간 논란이 거세다. 과거 통행금지 시절부터 한국의 투표소는 너무도 일찍 닫혔다. 지금 24시간 편의점이 불야성을 이루고 술집도 밤새 여는 집이 많은 한국에서, 투표소만 날이 채 어두워지기도 전에 닫는다는게 왠지 부자연스럽다. 우리나라는 부재자투표와 재외국민 투표외에는 투표일 이전에 투표할 수 있는 방법이 활성화되어있지 못한데, 투표시간마저 짧다. 수많은 야간 근무자와 투표일 당일 근무자가 있는 대한민국의 노동환경은 투표시간 연장 뿐만 아니라 휴일을 포함하는 조기투표를 도입할 필요를 충분히 뒷받침한다. 투표기간을 충분히 주고, 휴일에도 지하철역이나 인근 학교에서 편안히 투표하게 한다면 민의를 좀 더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지않을까.
투표라는 제도가 좀더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다면, 갈수록 바빠지는 현대인들에게 점점 더 무언가 불편하고 껄끄러운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무관심과 저조한 투표율속에 선출된 정치인은 당신의 돈을 법정 세금이란 명목으로 더 많이 가져갈 수도 있고, 복지 혜택도 단숨에 끊어버릴 수 있다. 정말 무섭지 않은가. 올해 할로윈 파티때 본 정말 감쪽같은 유령분장보다 투표소에 가지 못하는게 난 더 무섭다. 더 많은 이들을 투표케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 이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
김장현 미국 하와이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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