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오늘은 지인이 생을 마감한 날이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에게 죽음을 선택하게 한 것은 우울증도 지병도 아닌 막막함이었다. 그는 너무 막막하다는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양화대교 난간에 올랐다. 물론 그의 선택은 나빴다. 그의 선택은 오로지 그만의 선택이었고 그를 사랑하던 남겨진 사람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상처를 안겼기 때문이었다. 오늘 유독 그의 생각이 나는 이유는 내가 그보다 한 살이 많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도 그 막막함의 깊이가 어느 정도 예측이 된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패배주의라는 무서운 질병이었고, 그 증상이 막막함이었다. 상처 입은 코끼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무리를 벗어나 무리와 최대한 멀어지는 초원의 반대 끝으로 맹렬히 달려가는 코끼리를 생각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게임, 장기를 보면 양쪽 모두 왕을 중심으로 다양한 병과의 군대가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로 상병(上兵)이라는 게 있다. 코끼리로 이루어진 부대. 중국의 전쟁에서, 그것도 기원전인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에서 코끼리 부대라니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겠지만, 불과 수백 년 뒤를 무대로 한 삼국 시대에도 남만 전투에서 코끼리를 앞세운 전투가 등장한다. 중국과 가까운 인도에서는 4,000년 전(기원전 2,000년 전)부터 코끼리를 가축으로, 중국은 은나라 말기였던 기원전 1,100년 경부터 코끼리를 전쟁에 이용했다. 코끼리는 성품이 온순하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좋고, 기동력이 나쁘지만 시속 30km 정도로 돌진하는 돌격력은 인간이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전장에서 돌격용으로 배치되기도 했지만 진지를 구축하는 중장비로서의 이용도 가능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당시 인도에서 벌어진 휴다스페스강 전투에서는 자그마치 2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됐다. 당시 마케도니아군은 알렉산더 대왕의 뛰어난 전술로 코끼리와 정면 대결을 회피해 승리했지만, 피해가 너무 심해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코끼리는 짐이었다. 많은 사료를 먹었으며 그만큼 예산이 많이 드는 존재였다. 또 충성심이 강한 코끼리는 사육사가 죽으면 전장에서 지휘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커다란 못을 배에 박아 그 자리에서 죽였다. 왜 갑자기 코끼리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2030세대의 처지가 전장에 있는 코끼리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다. 지금 대한민국은 심각한 비관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살아있는 거의 모든 것이 경쟁의 전쟁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전쟁터 위에 아무것도 모르고 상대방에게 돌진하는 코끼리처럼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패배하고 아파하고 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지금은 막막하고 답답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형국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모두 아프다. 80세 어르신부터 10세 초등학생까지 병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우리는 환상에 사로잡혀있는 것 아닐까. 사실 우리는 선진국 국민도 아니고 우리 사회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배려와 복지는 단순한 환상이고 오직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경쟁과 상대의 침몰이 아니었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비관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코끼리이야기로 돌아가면 코끼리가 코끼리 무덤으로 향하는 이유는 죽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야생이라는 생존경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 앞에는 막막한 죽음밖에 없다. 관료들도 이런 비관론에 발목이 잡혔다. 경제정책의 관료는 아예 그동안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말을 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중장기 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성장이라는 말과 혁신이라는 강령을 건 대선 후보들도 실체가 보이는 공약은 직접 언급을 피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의 막막함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러니 겁먹지 말고 누구든 우리의 이 막막함을 조금만 덜어줄 수 있다면, 나는 그게 바로 진정한 혁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천정완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