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2000년 11월 7일 제 43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치른 후 이튿날 아침(현지시각)이면 당선자를 알 수 있던 관례가 깨졌다. 개표 결과에 대한 이의 제기는 투표 방법의 합법성에 관한 논란을 일으켰고 급기야 대통령간선제로 인한 헌정질서 위기마저 거론됐다. 한 달여간 지속된 혼란 속에서 각종 패러디가 쏟아지기도 했다. 미국보다 20일 후 선거를 치른 캐나다는 의원내각제를 택한 건국 시조들의 지혜를 꼽으며 유권자 직선으로 선출된 의회 다수당의 총수가 총리로 선출됐다고 자랑했다. 어떤 후보가 당선될 것 같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군은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되묻는 한 소수민족 외양의 시민에게 "미국 민주주의에서 군의 역할은 없다"고 잘라 답한 한 미국TV 보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민주주의의 초석인 선거가 비선출직으로 구성된 사법부의 판결에 의해 결정됐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의 선거는 4년마다 유권자 등록을 완료한 미국시민뿐 아니라 투표권이 없는 지구촌 시민 모두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다. 특히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치러진 2008년 선거는 '미국 대통령 선거 폐인'이라는 신조어까지 낳을 정도였다. '희망과 변화'를 약속한 민주당의 오바마 후보는 유색인종 배경에 초선 상원의원이라는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관록있는 공화당 상원의원 존 매케인 후보를 물리쳤다. 그러나 경제 회복의 속도가 기대에 못 미치자 2010년 중간선거에서 미국 유권자는 오바마에게 '혼전 합의'를 어긴 대가로 연방하원의 다수당 지위를 공화당에게 전달했다. 이후 민주당과 공화당 간 양극화가 심화돼 타협과 절충의 미덕을 활용하는 국정운영의 묘를 상실한 채 미국호는 국내외 난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2012년 11월 6일 미국 유권자는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에 동참할지 아니면 공화당 롬니 후보를 45대 대통령으로 선출할지 최종 판단을 내렸다. 공화당 경선과정에서 롬니 후보가 최종 지명자로 부상하면서 본격화한 두 후보의 선거전은 63조원에 달하는 역대 최대 선거자금 지출 기록을 세웠다. 롬니 후보와 그의 지지층은 오바마 대통령의 실정을 신랄하게 꼬집으며 국정운영 책임자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몰아붙였고 오바마와 그의 지지층은 강경한 어조로 이를 받아쳤다. 그 과정에서 양 측이 전개한 정치 광고전은 가장 소란스러운 정치 시장 풍경을 조성했다. 경제회복 둔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선거를 두 달 앞두고 터진 스티븐스 주리비아 미국 대사의 피살사건과, 선거를 열흘도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뉴욕과 뉴저지주에 극심한 피해를 안긴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선거 판국은 더욱더 요동쳤다. 도전자인 롬니 후보는 과도한 정부 개입으로 의료보험체계를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전세계에 미국의 위상을 추락시킨 장본인으로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목했다. 따라서 행정수반으로서 또 국가원수로서 오바마 대통령보다 자신의 자질이 탁월하다고 호소했다.
몇몇 주의 개표가 아직 남은 시점에서 대다수 언론은 27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확정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유권자는 롬니 후보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의 위업을 액면가 그대로 수용한 것인가. 연방하원은 여전히 공화당이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리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미국 대통령제는 엄격히 말하면 권력분립 구조이다. 분점 정부 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 성공의 위업을 달성했으나 동시에 국정운영의 방향, 속도 조정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만 통치 위업을 제대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교ㆍ안보 정책에 있어서도 선거 유세 기간에 롬니 후보의 강경 어조에 대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더구나 아시아로 외교의 무게 중심을 옮긴 시점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보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항로 선택을 마치고 잠시 정박한 미국호를 다시 운행한다. 곧 대한민국도 선택을 할 테고 그 선택의 조합에 2013년 이후 국운이 걸려있다. 2012년 미국 대선이 위대한 선택이었는지 여부가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대한 까닭이기도 하다.
이옥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국일보 대선보도 자문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