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60여가지의 품질보증서를, 그것도 10년 동안이나 위조해가면서, 수백 종류 수천개 부품을 납품해온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5일 품질검증서가 위조된 부품이 원전에 대량 공급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원전관리의 총체적 부실문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2월 고리 1호기 정전사고 및 은폐사건을 시작으로 올해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원전의 잦은 고장은 말할 것도 없고, 직원 마약투약사건에 위조부품까지 등장한 대규모 납품비리까지 적발되면서, 이제 원전 주변에선 "대체 기강이 얼마나 더 해이해질 수 있고 도덕성은 얼마나 더 땅에 떨어질 수 있나"는 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1차적 책임은 원전운영주체인 한수원이지만, 주무부처인 지식경제부와 관리감독기구인 원자력안전위원회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는 게 공통된 견해다. "원전이 문제가 아니라 원전을 다루는 한수원과 지경부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력공급기관이기에 앞서 국민안전이 걸려있는 원전이지만, 부품을 납품하는 과정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도 이런 식으로 납품을 받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에 적발된 8곳의 서류위조 납품업체는 원전에 사용하는 안전성 품목(Q등급 제품)을 구하기 어려울 때, 기술평가와 성능시험을 거친 일반 산업용 제품을 쓰도록 인정하는 '일반규격품 품질검증 제도'를 악용했다. 예를 들어 일반제품은 별도로 검증기관의 평가 및 시험을 거쳐 품질검증서를 받아야 하는 데 이들 업체는 위조한 검증서를 한수원에 제출한 뒤 부품을 공급했다. 전체 공급가액은 8억2,000만원에 달한다.
한수원은 그 동안 "자체적으로 인정한 12개 해외 품질검증기관에서 발급한 인증서를 통해 안전성을 확인한 뒤 부품을 구매해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해외기관에 검증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결국 납품업체가 제출한 '검증서 서류'만 받아온 사실이 확인됐다.
업계 관계자는 "한 두 번 정도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10년 넘게 아무런 확인 없이 인증서류를 받아왔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당납품업체와 한수원 직원간 유착이나 뇌물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한수원 관계자도 "과거 10년 동안 납품업무를 담당했던 직원들을 상대로 연루 가능성에 대해 자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한수원의 납품비리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 7월에는 간부급 22명을 포함해 총 35명의 한수원 직원들이 수십억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다. 특히 이번 사건은 한수원이 스스로 적발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된 납품업체의 경쟁사가 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수원이 그 동안 내세웠던 자체 납품관리 검증시스템은 '10년 비리'도 못 잡아내는 무용지물인 셈이다. 앞서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2008년부터 한수원의 직원 징계건수 122건 중 52건이 금품수수 혐의였는데도 지난해까지 자체 감사에서 이런 비위를 적발한 실적이 없다"(새누리당 권은희 의원), "고리원전 납품업체가 시험성적서 41건을 위조했다"(새누리당 정우택 의원) 등의 의원들의 질타가 쏟아지기도 했다.
지경부도 고개를 숙였다. 홍석우 지경부 장관은 이날 긴급 기자회견에서 "과거 10년 동안에 있었던 부당한 사례가 드러나 그 자괴감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틈만 나면 "우리 원전을 믿어달라"고 했던 홍 장관 역시 이 말이 무색하게 됐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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