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 아닌 흰색 불상
불교 비신자에도 거부감 없게 권위 대신 친근함 입혀… 아이돌 가수 닮은 보살상도
탱화 대신 프레스코화
불화의 전형적 인물 대신 석가모니 제자들 중심인물로… 바이올린 켜는 선녀도 등장
법당 한쪽 벽엔 갤러리
천정엔 단청 아니라 연등 달아 소통이 넘치는 공간으로
한국 불교미술의 새 길
조선시대 양식 답습은 그만
박제화된 법당 아닌 이 시대의 살아있는 공간 지향
"스님들 듣기에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술은 혁명'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한국 종교는 지금까지 예술을 포교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예술을 예술대로 존중해 종교가 이렇게 보듬어 안은 것은 처음이다."(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독일 법당에서는 금색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고 한다. 금색으로 칠하면 사치스럽다고 여겨 사람들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불상도 그 지역의,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다."(향적 스님)
5일 오후 2시 인천시 강화군 전등사에 무설전(無說殿)이라는 새 법당과 작은 미술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스님들과 신도들 그리고 이채롭게도 화가, 조각가들이 다수 모인 이 자리에서 서양화가 김 이사장이 축사를 한 이유가 있다. 불교의 진리는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을 담은 새 법당이 현대 한국불교가 시도한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법당 디자인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불상, 불화, 공간 구성 그리고 법당의 활용 방식까지 완전히 다른 개념의 불사(佛事)다.
창건일이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수도권 대표 고찰이 처음 불사를 계획한 것은 2008년. 문화재보호법에 묶여 애당초 경내 신축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형상변경 방식으로 템플스테이 건물 아래를 파내 반지하의 식당을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건물을 더 짓지도 못하는데 식당 보다는 설법전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고, 전등사의 명성에 걸맞은 법당을 고민하는 단계에서 주지인 범우 스님이 오래 전부터 한국 사찰의 미술 작업에 이의제기를 해온 동국대 오원배 교수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처음에는 불상, 불화 정도만 새롭게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간 구성 자체를 새롭게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장윤 스님(전등사 회주)의 지원에 힘입어 '무설전 창작단'이 꾸려져 지난해 3월부터 설계가 시작됐다. 불사는 사찰의 의뢰로 불교미술 장인들이 전통 방식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전등사 불사는 반지하를 지탱하는 기둥만 남기고 내부 콘텐츠를 모두 예술가들에게 맡긴 것이었다.
불상 제작은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만든 김영원 홍익대 명예교수, 불화는 오원배 교수가 맡았다. 공간 디자인은 이정교 홍익대 교수의 몫이었다. 한국 현대불교미술의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의욕적인 작업의 의의와 내용을 빠트리지 않고 기록해 출판물로 정리하는 작업은 윤범모 가천대 교수가 맡았다.
"전통 사찰의 단청이나 불상은 화려하고 무겁고 엄숙한 것이 일반적이다. 젊은이들이 갈수록 불교를 외면하는 것도 이런 과도한 무게감이 한 가지 이유다." 김 교수는 그래서 지금까지 금과옥조였던 금빛 대신 청동 불상에 흰색의 무광 폴리우레탄 재료를 칠했다. 조각 작품을 닮은 주불 등 5개의 불상에서는 위압적인 권위를 느낄 수 없다. 석가모니불 양 옆의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보살은 각각 아이돌 남녀 가수, 친근한 아줌마 아저씨의 얼굴을 형상화했다. 두상을 지나치게 크게 만들었던 기존의 불상과 달리 인체 비례도 균형을 잡았다.
오 교수는 "전통 불교미술의 미학적 문맥은 대중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색채, 구상으로 현대에도 통용될 수 있다"며 보통 탱화가 있어야 할 본존불 뒤에 회벽에 물감 작업을 한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었다. 법당 프레스코화는 무설전이 국내 처음이다. 벽화는 탱화에서 흔히 보는 문수, 보현 보살 대신 석가모니의 제자 가섭, 아난을 중심 인물로 삼았다는 점도 새롭다.
무설전 입구 쪽 벽 전체를 현대미술작품을 전시하는 서운갤러리로 만드는 등 예불과 공연, 전시 등 다목적 활용이 가능한 공간을 설계하면서 이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기 중심적인 염원이 앞서는 불당을 소통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단청 대신 천정에 연등 999개를 만들어 단 것도 그런 의미를 담았다. '1,000'을 채우는 마지막 연등은 "천정 전체의 큰 사각형"이다.
범우 스님은 "한국 불교가 천편일률로 전통이라고 따르는 조선시대는 실제로는 불교가 탄압 받던 시기"라며 "신라, 고려의 불교 미술이 훨씬 다양하고 자유분방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사찰은 스님도, 신도도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 그 시대에 맞는 살아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이번 불사의 의의를 강조했다. 향적 스님 말대로 전등사가 "한국 현대 불교미술의 진원지"가 될지 주목된다.
강화=글ㆍ사진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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