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1월6일 일본 아타미에서 벌어진 명인전 6번째 대국.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의 오타케 히데오 9단과 스물 네 살의 청년 조치훈 8단이 바둑판 앞에 마주 앉았다. 일본 바둑계 최고의 실력과 권위의 상징이던 제5회 명인전에서 조치훈은 오타케를 상대로 3승 1패 1무를 기록하고 있었고 명인이 되기까지는 1승만 더 올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진정한 최고수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조치훈은 6국을 치르던 이 날 새벽 4시에 잠을 깼다. 아침과 점심까지 거르며 평소 습관대로 성냥개비를 잘게 부러뜨리며 대국에 임했다. 초반부터 장고를 많이 했기 때문에 막판에는 초읽기에 몰렸으며 조끼와 넥타이까지 풀어 제쳤다.
마침내 조치훈이 제한시간 9시간의 이틀에 걸친 대전에서 흑을 잡고 247수만에 1집 반 승을 거두며 명인의 자리에 올랐다. 세계 최강이던 일본 바둑 타이틀을 약관의 한국인이 당당히 차지한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였지만 한국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대국에서 승리 한 후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어로"좋은 바둑은 아니었으나 운이 좋아 이겼다. 바둑이라는 세계에서 일생을 후회하지 않고 생을 마치겠다"며 수줍게 웃었다.
명인전은 17세기 초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창시된 일본 최고 권위의 바둑대회다. 4개의 바둑 고수 가문에서 번갈아 대국하며 승부를 겨루다가 62년 요미우리신문이 최고 상금을 걸며 랭킹 1위전으로 다시 창설했고 76년부터는 아시히신문이 이를 주관하고 있다.
그 해 12월 일본기원으로부터 공식 명인을 수여 받은 그는 이후 내리 5번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명예명인'이 되었고 한국 정부는 문화훈장을 수여하기에 이른다.
56년 부산에서 출생한 조치훈은 6세 때 삼촌인 고 조남철 국수의 손을 잡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바둑의 명망가인 기타니 미노루 9단의 제자로 들어갔다.
기타니 도장의 문하생 중 가장 어렸던 그는 68년, 만 11세 9개월의 나이로 일본기원 최연소기록으로 프로에 입단했고 78년 8단에 올랐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80년 8월 9단 승단을 제의 받았으나 실력으로 따내겠다며 이를 사양했고 마침내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 권위의 상징인 명인에 오른 것이다.
이후 일본 바둑은 조치훈의 시대였다. 83년 명인전, 기성전, 본인방전에서 우승하며 대삼관을 이뤘고 87년 천원전까지 따내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88년 10단전 타이틀을 얻은 그는 전무후무한 본인방 10연패까지 달성하며 신과 같은 존재로까지 추앙 받기에 이른다.
지난 9월 일본 바둑 사상 최초로 1,400승 기록을 세운 조치훈은 이제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입단 44년 만의 기록으로 이를 넘어선 한국 기사로는 조훈현, 이창호, 서봉수 9단 등이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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