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와 돈은 고맙게 잘 받았단다. 설령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림을 그리며 쓴 돈은 되찾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우울해지는구나. (중략) 나는 결혼이나 아이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린 것 같다. 이따금 35세라는 나이에 벌써 그런 느낌을 갖는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단다."
1887년 여름, 반 고흐는 화상이자 평생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테오의 권유를 받아들여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서 지낸 1886~1888년은 그가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였다. 작품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했던 그가 빈곤한 생활 속에서 쉼 없이 색채와 양식의 변화를 시도하며 실력을 단련한 시기이기도 하다.
8일 개막하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II:반 고흐 in 파리'전은 고뇌와 가난으로 점철됐던 30대 중반 반 고흐의 삶과 작품을 심도 있게 만날 수 있는 전시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서 2005년부터 진행해온 파리시기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기획됐다. 지난해 봄, 반 고흐 미술관에서 첫선을 보여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번 한국 전시는 작품을 추가하고 구성을 달리했다.
전시는 크게 1, 2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파리시기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보기 위해 파리 이전의 네덜란드 시기와 파리 이후인 아를르 시기의 작품이 함께 전시된다. 파리시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회색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1887)과 '탕귀 영감' (1887)이 여기에 걸렸다.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상이나 풍경화를 주로 그렸던 네덜란드 시기의 '여인의 초상'(1885), '황혼녘의 가을 풍경'(1885) 등도 만날 수 있다. 파리시기에 그는 화병에 담긴 꽃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지인들이 매일 같이 그에게 꽃을 선물해 색채를 마음껏 실험할 수 있었다.
2부에는 반 고흐 미술관의 연구결과가 망라된 파리시기 작품이 9개의 테마로 나뉘어 전시된다. '작품의 재료는 무엇인가' '작품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작품 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작품의 원래 색은 무엇인가' 등으로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펼쳐진다.
모델료가 없던 반 고흐는 자화상을 통해 실험을 거듭했는데, 역시 같은 이유로 한번 사용한 캔버스를 덧칠하거나 물감을 긁어내 재사용한 흔적을 엑스선 촬영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작품 속의 새가 그동안 알려졌던 종달새가 아니라 자고새였다는 사실, 반 고흐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작품이 사실은 동생 테오의 초상화였다는 사실 역시 새롭게 밝혀진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순주 커미셔너는 "첨단 과학을 이용한 오랜 연구를 통해 반 고흐의 작품이 완전히 해부됐다"면서 "물감의 변화, 그림 속 인물 등 그동안 비밀스럽게 유지됐던 원화의 숨겨진 스토리를 이번 전시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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