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톈안먼(天安門), 티베트, 이 세 단어는 쓰면 안돼. 중국 언론이 절대 금기시해야 할 단어들이네."
2007년 2월 중국계 미국인 에블린 차오는 경제잡지 차이나인터내셔널비즈니스(CIB)에서 일하기 위해 중국에 왔다. 뉴욕에서 태어나 처음 모국 땅을 밟은 차오에게 사장은 곤혹스러움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기사에 실어선 안 될 것들을 설명했다. 중국에서 30년 넘게 사업을 하고 있는 사장은 대만 출신이었다.
"검열에 대해선 앞으로 더 자세히 듣게 될 거야." 사장의 미심쩍은 말 한 마디와 함께 차오의 중국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지도에 댜오위다오 빠지면 절대 안돼요."
중국의 모든 합법적 언론사는 상무부 소속 검열관의 검열을 받는다. 중국에서 발간되는 영문 매체 대부분이 민영 기업과 제휴를 맺는 방식으로 사업허가를 얻는 반면, 차오가 일한 CIB는 거의 유일하게 언론사로 허가받은 잡지다. 덕분에 CIB에 카피에디터로 들어가 편집장으로 승진하기까지 2년간 차오는 중국 정부의 언론 검열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차오가 검열관 스노(그의 요청에 따라 별명을 사용한다)를 처음 만난 것은 편집회의에서다. 40대의 스노는 긴 머리에 어린애 같은 목소리를 가진 신경질적인 여성이었다. 매달 편집장은 다음 호에 실을 기사를 결정해 스노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기사 편집이 끝나면 다시 한번 발송했다. 그러면 스노가 수정본을 보내왔다. 수정된 기사를 지면에 배치한 후 스노가 최종 OK 사인을 보내면 인쇄에 들어가는 식이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자 차오는 스노의 표정만 보고도 중국 정부의 호불호를 짐작할 수 있게 됐다. 가령 '톈안먼 사태 이후'란 표현은 '1989년 6월 이후'로, '문화혁명'이란 단어는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으로 수정돼 돌아왔다. 반면 사업이나 투자를 장려하는 기사는 대부분 통과됐다.
가장 민감한 것은 영유권 문제였다. 풍력발전에 관한 기사를 특집으로 다뤘을 때 기사에 실린 중국 지도를 본 스노는 "대만은 물론이고 댜오위다오((釣魚島)도 반드시 지도에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댜오위다오는 일본과 영유권 분쟁 중인 동중국해의 작은 군도로,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다. 스노는 디자인팀이 그린 지도에 댜오위다오가 포함돼 있지 않자 그 자리에서 포토샵으로 중국 영토 아래 쪽에 작은 점들을 찍도록 했다. "자세히 그릴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점만 몇 개 찍으면 돼요."
우스꽝스러운 검열도 있다. '치솟는 세계 식량가격'이란 기사에 한 경제학자의 의견을 인용해 "중국인들의 삶의 질이 올라가면서 고기 소비량도 늘어날 것"이란 문구를 넣자, 스노는 중국인들 때문에 식량가격이 올랐냐며 펄펄 뛰었다. "서양인들은 전부 채식주의자인가요? 미국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그 사람들이 감히 중국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요?"
"마오는 미쳤어요… 우리끼리니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검열에 대한 차오의 거부감은 희미해져 갔다. 동료 기자들 사이에선 스노의 별명을 이용해 "이번엔 한바탕 폭설이 내리겠군" "이런, 제설기가 한바탕 밀고 지나갔네" 같은 농담이 유행했다.
그러나 기자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끼는 날도 적지 않았다. '중국에선 왜 합작투자가 힘들까'라는 칼럼에서 '외국기업의 관심이 좌절됐다'라는 문장이 '외국기업의 관심은 여전히 높다'로 둔갑했을 때가 그런 경우였다. 스노는 다른 설명없이 "잘못된 의견입니다"라는 말만 보내왔다.
결정적으로 차오가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은 티베트 승려 분신 사건 때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중국 정부는 승려들의 연이은 분신에 허를 찔리자 언론 검열을 비상식적 수준으로 강화했다. 정전(Power failure)이란 단어는 "올림픽의 실패(failure)를 의미한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식당 소개 기사에 삽입된 빈 그릇 사진은 "빈곤과 기아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고기가 잔뜩 들어간 그릇으로 교체됐다. 마침 편집장으로 승진한 차오에게 스노는 거듭 '협조'를 당부했다.
"당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 외국인인 전 편집장보다 당신이 더 중국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차오는 자신이 중국 출신이기 때문에 정부의 검열에 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스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받는 월급이 언론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가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편집장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스노의 태도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시내의 교통체증과 낮은 시민의식에 대해 연방 불평하던 스노는 "실은 직장을 바꾸고 싶다"며 "나중에 컨설팅기업 같은 것을 차리면 날 꼭 고용해달라"고 말하고는 경쾌하게 웃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스노는 남편의 형제가 총 12명인데 지금은 6명만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땐 특별한 일도 아니었어요. 마오쩌둥(毛澤東)은 미쳐가고 있었고 자식을 5명씩 낳는 여자들을 영웅 대접했죠. 그것 때문에 지금 중국이 가난에 허덕이게 됐지만… 하지만 당시 마오는 미쳤었고……"
그러다 갑자기 스노는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미소를 띠며 차오를 쳐다봤다.
"알겠어요? 여긴 우리 둘만 있으니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중국이에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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