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설 장민호 별세
해방 후 한국 연극의 산 증인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존경 받은 원로 배우 장민호씨가 2일 새벽 1시45분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10년 전 수술을 받았던 폐기흉이 재발해 지난해 6월부터 투병 해왔다.
황해도 신천 출신인 고인은 1946년 서울로 와서 한국 최초의 연기자 양성소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면서 연극에 발을 들였다. 47년 극단 원예술좌의 종교극 ‘모세’의 주연으로 무대에 데뷔한 이래 생애 마지막 공연이 된 지난해 국립극단의‘3월의 눈’까지 200편이 넘는 작품에 주ㆍ조연으로 출연했다.
‘3월의 눈’에서 그는 60여년간 함께한 단짝 배우 백성희(87)씨와 주인공 노부부로 나와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드는 진한 감동을 남겼다. 이 작품은 국립극단이 두 사람의 이름을 붙인 백성희장민호극장의 개관 기념작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한국 현대연극의 1세대는 백씨만 남았다.
연극배우 장민호는 리얼리즘 연기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3월의 눈’을 연출한 국립극단 예술감독 손진책씨는 그를 일러 “한국 배우가 20세기 역사에서 도달한 고산준령이자 상징”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배우로 산다는 것은 그에게 도전한다는 의미”라고도 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의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네 번(66년, 77년, 84년, 97년)이나 파우스트 역을 맡아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파우스트 장’으로 각인됐다.
국립극단은 그가 생애 대부분을 바쳤고 마지막까지 몸 담은 곳이다. 연출가 이해랑의 극단 신협에서 활동하다가 62년 신협이 국립극장 전속 극단이 되면서 국립극단 배우가 됐고, 국립극단 단장을 두 번(67~69년, 79~90년) 지냈다. 단장으로 일한 첫 번째 시기인 60년대 말에는 극장 마음대로 하던 레퍼토리 선정과 연출가, 배우 섭외를 극단과 상의하도록 바꿔 공연의 질을 높였다. 두 번째 재임 시기 11년 간은 한동안 침체에 빠졌던 국립극단을 재정비해 한국 연극의 핵심 중추로 키웠다. 2010년 국립극단 법인화로 상근 단원이 없어진 뒤에도 백성희씨와 함께 원로 단원으로 남았다.
그는 ‘천상 배우’였다. 누구보다 철저하게 작품을 준비했고 공연 시작 전 5분간 명상을 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무대에 나갔다.‘3월의 눈’을 할 때는 고령에도 가장 먼저 대본을 외우고 나와 ‘암기 민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라디오 성우, TV와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다. 47년 KBS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 성우로 들어갔고, 한국 방송 사상 최장기 라디오 드라마인 동양방송의‘광복 20년’에 67년부터 20년간 해설자로 출연했다. 영화는 50년대부터 시작했고 2000년대 작품으로는‘서편제’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영애씨와 1남 1녀가 있다. 장례는 연극인장으로 치른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이고 영결식은 5일 오전 10시 서울 서계동의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한다. 장지는 경기 성남 메모리얼파크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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