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탱크도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장사가 안 돼. 월세도 못 낸다니까.”
‘쇳밥’을 먹고 사는 청계천 공구상가. 이곳, 서울 중구 산림동에서 ‘ㅌ공사’를 운영하는 박희두(가명ㆍ80)씨는 지난달 30일 “물건 사러 오는 사람이 있어야 기계를 돌리지. 쇠 깎는 저 기계 돌려본 지가 언젠지 까마득해”라고 말했다. 검게 그을린 나무선반 위에는 먼지 쌓인 파란 베어링이 수북했다. 한라산, 에쎄, 마일드세븐 같은 담배가 퀴퀴한 냄새 나는 목조건물 한켠을 차지했다. “담배 팔아서 살아. 월세(55만원)를 못 내 보증금 2,000만원만 까먹고 있어. 곧 쫓겨날 처지야.”
1933년 이북에서 태어난 박씨는 한국전쟁 때 남으로 내려와 60년대 초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청계천을 끼고 공구상가가 막 들어서던 시기였다. ‘한강의 기적’으로 이곳도 “다시 못 올 호황”을 누렸고, 박씨가 만든 메다루(메탈베어링), 베어링케스(베이링케이스), 주철ㆍ청동제품 역시 잘 팔렸다. 그러나 “주말에도 일해야 공급물량을 맞출 수 있었던 시절”은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4년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곳 일대를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후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2006년 시장 선거 공약으로 ‘세운초록띠공원 조성사업’을 내걸었다. 세운상가 주변을 재개발해 폭 90m, 길이 1㎞의 녹지공간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박씨는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재개발 보상비를 받아 다른 곳으로 이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혀 진척이 없다. 그 사이 재개발로 지정된 세운5구역(산림동ㆍ주교동ㆍ을지로4가동) 일대 1,300여개 점포 중 900개가 문을 닫았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비슷하다. 세운4구역은 전체의 80%가 빈 상가다. 그는 “재개발 믿고 여기 사람들이 오세훈, 이명박에게 표를 몰아줬는데, 책임지지 못할 공약은 왜 내놔 상권만 더 죽여 놓은 건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을지로4가동에서 20년 넘게 특수인쇄업체 ‘ㅇ산업’을 운영한 오문기(57)씨는 ‘청계천의 봄’을 이렇게 기억했다. “골목 마다 물건 주문하려는 사람들이 타고 온 차로 붐볐어요. 오죽했으면 골목 상인들이 교통정리요원을 고용했겠습니까.” 1989년 자본금 300만원으로 차린 그의 사업 역시 봄바람을 타고 날로 번창했다. 창업 3년 만에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아파트를 샀다. 97년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1동에 지상 4층짜리 공장도 세웠고, 2년 뒤 그간 세 들었던 건물도 매입했다.
그러나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꿈쩍도 않는 재개발 탓에 상권이 죽으면서 매출이 예전보다 30% 감소했다. 오토바이 헬멧 수출업체에 매달 10만개씩 납품하던 브랜드 스티커는 수천 개로 줄었고, 사원은 13명에서 4명 정리해 지금은 9명만 남았다. “잔디 심은 운동장이 딸린 수백 평 규모 공장을 세우는 꿈”도 덩달아 멀어졌다.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되면서 현재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 상태. 오씨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며 “정치인들이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데, 시들시들해져 점차 죽어가는 우리는 국민도 아니냐”고 말했다.
세운상가 재개발 지역에 포함된 사람들은 세입자, 지주 할 것 없이 불만을 털어놨다. 찌든 때가 묻은 군복을 입고 쇠를 깎던 50대 박모씨는 “정치인들은 모두 사기꾼”이라며 강한 불신을 표했다. 작은 슈퍼마켓 주인 김모(71)씨는 “저녁 이후엔 사람이 지나다니 않아 범죄위험지역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당국은 몇 년째 방치하고 있다”고 했다. 구청에서 세운5구역 큰 길목에 폐쇄회로(CC)TV 4대를 설치해줬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이곳의 일과는 다른 지역보다 빨리 끝났다. ㅌ공사 박희두 씨는 오후 6시가 되기 전에 가게 문을 닫았다. 주변 공업사도 하나 둘 불을 껐다. 청계천 공구상가 일대는 밤이 되자 아무도 거닐지 않는 ‘죽은 거리’가 됐다. 어슬렁대는 노숙자만 가끔 눈에 띄었다. 영화 ‘피에타’의 촬영장소인 이곳은 생채기 난 과거의 영광과 쇠락한 첨단,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토해내고 있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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