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최윤필의 공간엿보기] 일순간 정적 깨는 격렬한 승부… '대물 꿈'에 낚이고 마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최윤필의 공간엿보기] 일순간 정적 깨는 격렬한 승부… '대물 꿈'에 낚이고 마는

입력
2012.11.02 12:09
0 0

사냥보다 수월, 150만년 전 시작

돈·유희 위한 행위로 변질돼 자연서 인공낚시터로 차츰 이동

빤한 물속일지라도, 날밤을 새도 한가닥 희망에 '꾼'들은 못 접어

대어의 계절, 게임이 시작됐다

비껴간 좀 전 그 바람에 잠시 흔들렸던 걸까? 물그림자 따라 밤새 한결같을 것만 같던 찌의 일렁임이 언뜻 수상쩍어졌다. 무료한 듯 풀려 있던 낚시꾼의 눈초리가 일순 가늘어지고, 들숨의 정점에서 숨이 멎는다. 등에서 허리 그리고 장딴지로 이어지는 굵은 근육들이 팽팽해지고, 방만하게 기울었던 몸도 이미 꼿꼿이 섰다. 2초, 3초, … 5초. 반사적으로 내뻗은 손은 흔들림 없이 낚싯대 위에 떠 있다.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향해 내닫기 직전의 무호흡 상태. 그 짧은 긴장의 순간 낚시꾼의 시계는 호흡과 함께 멎고, 세상도 자전을 멈춘다. 고대 바빌론 사람들은 어쩌면 그래서, 신이 인간의 수명에서 낚시하며 보낸 시간을 제해 준다고 믿은 걸지 모른다.

어쨌거나 애석하게도, 찌의 일렁임은 금세 원래의 리듬을 회복했고, 낚시꾼도 묶어뒀던 숨을 풀며 느긋한 자세로 돌아왔다. 밤새 수십 차례 그러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는 불평하는 법이 없었고, 정 무료하면 속은 줄 알면서도 낚싯줄을 거둬 미끼를 갈아 끼우곤 했다.

갑자기 찌가 노골적으로 흔들리더니 불쑥 솟아오른다. 그 솟구침은 불과 4~5㎝도 안 되지만, 긴 시간의 정적을 견딘 낚시꾼에게는 동해의 일출보다 장엄하다. 수면을 째며 찌가 내닫는 것과 동시에 그는 낚싯대를 챈다. 주둥이가 찢어져라 내빼는 물고기의 사투에 낚시꾼도 혼신을 다해 맞선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믿고, 낚싯줄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자신이 낚은 것이 괴물 같은 대어라고 믿는다. 낚아 올린 녀석들은 거의 늘 기대를 배반하지만, 좋은 낚시꾼은 실망하지 않는 법이다. 이번에는…. 그는 다시 찌를 던진다. 언제나 '다음'은 있고, 다음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결 같은 물이 있다. 이 행성 표면의 2/3를 차지하는 거대한 이계(異界). 찌와 함께 격렬하게 흔들렸던 그 세상도 거짓말처럼 다시 정적에 빠져들고, 낚시꾼도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 아드레날린의 출렁임을 제 호흡으로 잔잔하게 잠재운다.

맨 처음 낚시를 시작한 이는 아마 천재였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혈거인이 뼈에 남긴 도구흔적과 뼈 무더기의 위치 등을 근거로 낚시가 약 15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의 시대부터 행해졌다고 추론한다. 낚시는 짐승을 사냥하는 것보다 쉽고 덜 위험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지(gorgeㆍ날카로운 뼈나 조개껍데기 등으로 만든 양날형 도구로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실을 묶을 수 있게 돼있다)나 창을 만들었고 미늘을 고안해냈을 터다. 육식동물들이 먹다 남긴 썩은 고기나 나무열매를 먹던 그들에게 싱싱한 물고기는 신의 축복이었을 것이고, 농경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물가를 누비며 낚시를 하고, 얕은 개울을 만나면 한 데 어울려 물고기를 쫓기도 했을 것이다. 개중에는 그들의 고향, 모든 뭍의 생명의 고향이 자신들이 마주하고 선 그 광활한 이계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기억해내곤, 그 풍요롭고 유구한 물의 존재에 고개를 숙였을지 모른다.

등 뒤의 세상, 그러니까 뭍에서의 삶은 거의 늘 허덕지덕했을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와 힘센 짐승들의 섬뜩한 울부짖음 속에 남겨두고 온 힘 없는 혈족들은 자신이 들고 갈 실한 단백질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낚시라는 행위에는 그런 오래된 사연들이 깃들어 있고, 모든 낚시터는 그 숭고하고도 절박한 맥락을 아득하게 잇고 있을 것이다.

이제 단백질을 얻기 위해 물가를 기웃거리는 사람은 드물다. 어로를 업으로 삼고 강이나 바다에 나서는 이들은 이제 낚싯대보다는 주로 그물을 편다. 기다리는 대신 쫓아다닐 때가 많고, 몸의 감각보다는 초음파 어군탐지기의 지시를 따른다. 그물로 그들이 잡는 것은 물고기지만, 대개의 생업이 그러하듯 그들이 구하는 것은 단백질이 아니라 생계와 가계의 번성을 위한 돈이다.

낚시꾼에게 낚시는 노동이 아니라 유희다. 바다낚시를 즐기는 이들, 또 민물낚시꾼 중에도 낚은 것들을 먹는 이들이 있지만 그 행위 조차도 섭생이 아니라 유희일 때가 많다. 이제 낚시-특히 민물낚시-는 잡아먹는 낚시가 아니라 놓아주는 낚시다. 그들은-대개는 남자다- 남자로서의 생물학적 책임에 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책임으로부터 잠시나마 놓여나기 위해 낚시를 한다.

낚시의 의미가 달라지면서 낚시터도 다양해져서, 이제 농구장 두어 개쯤 붙여놓은 듯한 웅덩이에 입장료를 내고 앉아서도 낚시를 즐기는, 처음엔 우스꽝스럽고 측은하기까지 하던 사정도 그런가 보다 하게 됐다. 겨울 낚시를 위해 대형 비닐하우스를 두르고 난방시설까지 갖춘 낚시터도 적지 않고, 심지어 빌딩 속에 설치된 인공 수조에 둘러 앉아 낚시를 하는 유료낚시터가 생긴 지도 꽤 됐다. 탕 둘레에 빙 둘러앉아 몸을 씻는 대중목욕탕처럼, 채 1m도 안 되는 간격으로 줄지어 앉아 옆 사람(혹은 건너편 사람)의 낚싯줄과 엉킬까 봐 캐스팅도 엉거주춤 해야 하는 그런 곳에서의 낚시를 장난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수면은 한시도 잠잠할 때가 없고, 물고기들의 동정까지 보일 만큼 빤한 물속이니 찌를 응시하는 재미도, 또 그럴 필요도 사실 없다. 잡은 물고기는 놓아주는 것이 원칙이고 예의다. 그래서 다음 손님을 위해 미늘 없는 바늘을 써야 하고 비늘 다칠 새라 뜰채로 떠올리게 해둔 곳도 있다. 맥 빠진 기분 탓인지, 잡혔다 풀려났다 하는 데 이골이 난 물고기의 타성 탓인지, 바늘을 문 물고기의 몸부림조차 심드렁해 보인다. 그래서 성취감도 시들하다. 언제 어떤 어종을 몇 마리쯤 풀어 넣었다는 홍보 안내판은 중국음식점 대체로 뻔해서, 거기서 전설의 대어를 꿈꾸는 스릴도 없다.

하지만 그런 곳도 엄연한 낚시터인 까닭은, 물고기를 낚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낚시꾼들이 자신의 희망을 확인하고 지탱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만년 스크린골퍼들과는 달리, 그들은 이번 주말 혹은 월말 연휴의 희망을 그 옹색한 캐스팅을 통해서나마 확인한다. 그들이 거실 벽에 걸어둔 월척(붕어 기준 한 자 이상) 어탁은 수시로 감격의 순간의 환기하고 타인에게 자신이 그쯤 되는 낚시꾼임을 자랑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다음에는 4짜(40㎝이상) 5짜를 저 곁에 걸겠다는 다짐, 또 걸 수 있다는 희망을 다지려는 의도도 있다. 좋은 낚시꾼은 어탁보다 그 곁의 빈 자리를 더 자주 응시하며 백일몽을 꾼다. 주위의 누가 중독자라며 눈 흘기건 말건, 그 때의 거실 소파도 그에게는 가상의 낚시터가 된다. 또 중독된들 어떠냐고 말하는 이도 있다. 심리학자이자 낚시광인 미국의 폴 퀸네트라는 이는 라는 책에서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치료 프로그램으로서의 낚시의 성과를 소개하며 "인간이 고통 대신 선택하는 것이 중독"이지만 중독 가운데에는 낚시처럼 긍정적인 중독도 있다고 썼다.

'인터넷 낚시질'이란 말도 낚시꾼들에게는 표피적 이해에 근거한 언어폭력이다. 미늘 달린 바늘에 알량한 미끼를 끼거나 아예 가짜 미끼로 물고기를 현혹하는 얄팍한 행위로만 낚시를 치부하는 저 말은, 그들 입장에서는, 사연과 맥락을 덮어둔 채 눈에 보이는 껍데기만으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지를 반증한다. 저 말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거기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결과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낚시터에서 조황의 양을 살펴 이(利)를 따지지만, 대다수 낚시꾼은 맞섬의 양상과 질(質)을 중시한다.

생초보가 아닌 한 낚시꾼 대부분은 자기가 평균 이상 가는 실력자라고 내심 자부한다고 한다고 한다. 그래서 날이 저물도록(혹은 날밤 새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한 마리도 못 잡고 있어도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마지막 캐스팅'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그러다 주변의 누구든 한 마리라도 잡으면, 요컨대 누군가의 희망이 확인되면 마치 제 희망도 열린 듯 '이제 시작'이라며 새로워진다.

바람이 선득해지면 낚시꾼들의 마음은 설레기 마련이다. 수온이 식는 이맘때부터 대물들의 입질이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상수원보호구역에서 최근 해제된 수로나 저수지가 어딘지, 또 어느 낚시터의 조황이 좋은지 탐색하고, 새로 나온 채비들의 평판을 확인하고 장비를 챙긴다. 물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 떠도는 그들에게 낚시터는 멋진 자연과 고독, 때로는 가족보다 진한 결속감을 지니게 될 인연을 만나기도 하는 공간이다. 크기나 마릿수 못지않게 그들이 간직하는 승부의 기록에는 자신과 대결한 물고기의 근성도 있다.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야생의 몸부림, 그 자유반사의 격렬함의 정도로 물고기의 영혼의 크기를 잴 줄 안다면 그들은 이미 한 경지에 이른 낚시꾼이다. 그들은 "자유반사가 없으면 자유도 없고, 자유가 없으면 종은 멸망한다"는 퀸네트의 멋진 문장에 흔쾌히 공감한다.

선임기자 proose@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