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은 으레 낡은 것에 대한 환기와 물결처럼 일렁이며 나아간다. 미친 듯 내닫다가도 멈칫멈칫 나아가고, 때로는 되돌아서기도 하면서 놓친 것 남겨두고 온 요긴한 것들을 챙기고, 치우친 자세를 교정한다. 한편 열정이 가파르면 뒤이은 환기는 반성과 그리움으로 치우치기 쉽고 자칫 감상이 되기도 한다. 오래된 것의 미덕을 과장하고, 무의미한 불편을 무책임하게 미화할 때도 있다.
도시 공간에 대한 반성도 그럴 때가 있다. 베껴 쓴 답안지처럼 정형화한 공간, 편리와 합리의 과잉에 질식해버린 여유, 치밀한 도시'계획'들이 좀처럼 계획하지 못하는 일상의 돌출적인 필요들, 예컨대 빈 도화지처럼 아무런 용도 없이 내버려 둔 빈 공간의 부재…. 그런 상념과 맞서는 자리에 우리는 전근대의 공동체적 가치들이 안정적이고도 자족적으로 구현된 이상화한 마을 풍경을 놓아둘 때가 잦다. 전자(前者)가 공간의 계속성에 대한 폭력적 단절이라면, 후자는 일상이라는 맥락에서의 이탈이기 쉽다. 공간에 대한 건강한 반성은 공간 자체가 지탱해 온 이야기의 맥락과 그 공간에 깃들여 사는 이들의 현재적 삶의 맥락을 함께 고려한다. 이 책의 저자가 지방도시 9곳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 반성하고, 바람직한 내일을 그려보는 방식이 대체로 그러하다.
대상이 된 도시들은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전형 너머에 있다. 밀양 통영 안동 춘천 안성 강경 충주 전주 나주. 역사나 전통에 아주 파묻히지도, 근대나 탈근대의 몰개성으로 너무 날뛰지도 않은, 다만 긴 역사와 걸어 다닐만한 작은 도심을 지녔고 현대도시로서의 매력과 잠재력을 지닌 지방 소도시들. 역사가 길고 작은 구도심이 있다는 것은 공간과 공간에 깃들여 산 이들의 사연이 공간 속에 맥락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이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은 그 맥락을 현대적으로 아름답게 이어갈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바다와 예술가들이 빚어낸 도시 통영' 편에서 저자는 국도14호선이 시작되는 뭍의 시작 공간으로서의 통영보다 바다를 감싸 안은 포구로서의 통영을 본다. "지세의 방향으로 보나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보나 바다 쪽이 통영의 입구이고 정면이었다." 유치환 이중섭 등 숱한 예술가들을 품었던 내력도 그 같은 지세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농촌마을에서는 앞-뒤의 개념이 강한 반면, 도시 주거지에서는 중앙-주변의 개념이 강하다.(…) 농촌마을에서는 뒤쪽 높은 곳에 있을수록 위계가 높으나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다." 동피랑, 서피랑(피랑이란 말은 벼랑에서 나온 말인 듯) 같은 통영의 산자락 마을들이 품은, 등고선처럼 가로 흐르는 길들과 항구를 잇는 오름길의 교직. 그 비탈의 작은 공간을 나눠 갖느라 길이 집을 관통하기도 하는, 그 오래 이어져온 계획과 지혜와 기억들의 퇴적층 위에서 필자는 통영다운 현대적 고밀도 주거공간의 형상을 떠올린다.
필자는 옛 도로, 하천 등 자연지형, 골목과 주거공간의 조화 등을 통해 도시공간 전체를, 이어져 온 역사적 내력과 함께 살핀다. 밀양에서는 뱀처럼 휘어 도는 밀양강이 얼개가 되고, 안동에서는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막히기도 하는 오래된 골목길이 도드라진다. 항공기로 살펴 고축적 지적도로는 담아낼 수 없는, 오직 걷거나 자전거로 누비는 식의 '적절한 규모의 인간적 척도'로만 사유될 수 있는 고유성과 개별성들을 그는 살핀다. 젓갈도시 강경이 젓갈 쇼핑뿐 아니라 '강의 풍경'을 체험하는 도시가 되기 위해서, 또 무(武)와 예(藝)의 도시 충주가 두 가치의 축을 잇는 공간적 서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등의 제언도 그래서 솔깃하다.
저자의 도시 탐방은 오래된 골목길을 산보하듯 느리다. 단락의 체계나 주제 중심의 장악력도 느슨해서 자주 산만하고, 시시콜콜히 소개하는 낯선 지명들도 몰입도를 유지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아니 그게 어쩌면 이 책의 매력인지 모른다. 광역 도시계획이 놓친 것들을 살피자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자 형식이기 때문이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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