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시인, 음악가, 화가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쳐온 저자의 미니픽션집. '사랑의 시작을 위한 서른아홉 개의 판타지'란 부제처럼 일상에서 간파해낸 39편의 사랑 이야기를 독특한 시각으로 다듬어 한데 엮었다. 표제작 '코'는 예쁜 여자와 돈 많고 못생긴 남자의 인연이 왜 끊어졌는지를 살피며 사랑을 둘러싼 인간 군상의 허약한 욕망을 건드리고 허를 찌르는 웃음을 준다. '회오리'는 70~80년대나 있을 법한 사랑이야기다. 소설 초반, 아저씨와 말라깽이 여자의 의미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아내가 있으면서도 처녀를 범하는 남자, 이왕 저질러진 일이기에 그런 것도 사랑이라 믿는 여자. 이 처녀는 그 집의 식모였다. 대개의 이야기들이 이렇게 반전의 묘미를 갖고 있다.
콩트 정도의 분량이라 미니픽션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짧은 글마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단단한 필력과 깊은 통찰, 에로틱한 상상력, 사투리와 신세대 언어를 한데 아우르는 실험정신 등이 돋보인다.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을 덧붙이고, 초판에 한정해 작가의 노래를 녹음한 CD도 곁들여 이제하 작품세계의 묘미를 맛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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