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남녀가 스치는 찰나 글 속에 섬세하게 가둬서사·감정선의 완급조율 등 이야기 끝까지 강한 흡입력"차기작은 고통에서의 회복"
찰나는 우리가 붙들 수 없는, 그저 지나가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는 무엇이다. 그것은 음악이나 영상보다는 소설가의 몇 줄 글로 더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는지 모른다. 그가 글 속에 찰나를 가둘 줄 아는 섬세하고 예민한 작가라면 말이다.
한강(42)의 장편 (문학동네 발행)은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만나 한 순간 빛을 발견하는 찰나를 그린 소설이다. 이혼한 남편에게 아이를 빼앗기고 한 순간 말을 잃은 여자는 전에 낯선 언어를 배우며 같은 상황을 극복한 경험 때문에 희랍어 강의를 듣는다. 희랍어 강사인 남자는 독일에 가족을 두고 온 고독한 인물로 선천적인 질병으로 서서히 시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평행선처럼 흐르다 마침내 교차하는 순간 소설이 빛난다.
"고독한 남녀가 한 순간 스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는 "말이나 빛 같은 서서히 무언가를 잃어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세계를 잃어간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우리의 얘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감정을 밀어내고자 하는 여자의 고통이나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남자가 가진 회한은 소설에 습기를 머금게 한다. 그리고 먹먹한 아우라를 풍긴다. 그래서 이야기는 특별한 기승전결의 사건이 없어도 흡입력 있게 조용하면서도 강한 힘으로 마지막까지 몰아친다. 그래서 이 소설을 두고"참된 욕망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0도 근처에서 차갑게 끓어오르는 글쓰기의 언저리까지 기어이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문학평론가 이소연)는 평이 나온다.
20대 초반에 등단해 몇 권의 소설집과 이번까지 다섯 편의 장편을 낸 작가는 특유의 문체로 다른 소설가들이 쉽사리 흉내 내지 못할 품격 있는 소설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무용가 피나 바우쉬에 빗대 "어떤 때는 아예 스텝을 밟는 것 조차 모르겠다고 하는 그처럼 소설쓰기가 항상 막막하고 두렵다"는 그의 말은 지나친 겸손이거나 완벽주의로 들렸다.
은 작가가 서사의 완급이나 인물들의 감정선을 완벽하게 조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이미지와 정념마저 표현하고 있는 수작이다. 가령 여자 주인공의 고통을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지만 어릴 적 키우던 개가 차에 치여 죽어가면서 그를 물었다는 식이다.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고통 이후 삶이 부서진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회복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많아서 되도록 빨리 쓰려고 하고 있어요. 지금도 네 편 정도 써야 할 게 있는데…. 큰일이에요. '이거 다 못썼는데…' 죽을 때 그럴까 봐."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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