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경기 이천시 설성면 제요리. 마을과 초등학교를 연결하는 긴 굴다리에 15명의 고등학생들이 모였다. 길이 72m 높이 4m의 거대한 회색 시멘트 벽에 생기를 불어넣겠다고 똘똘 뭉친 이들이다. 직접 준비한 페인트와 붓을 들고 꼬박 이틀 어두운 터널에 머물며 완성한 것은 미국 뉴욕 거리화가로 유명한 키스 헤링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낙서 벽화. 휑한 굴다리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재밌는 그림들로 채워졌다. 그걸 본 동네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와 "고마워"를 연발했다.
허름한 시골 동네에 뉴욕 골목 못지 않은 거리 갤러리를 선물한 주인공은 바로 용인외국어고 그림봉사동아리 '코코스'. 이들은 지난달 농림수산식품부가 주최한 '2012 농어촌 재능기부활동 수기 공모전'에서 지난 7월 벽화 봉사 경험을 쓴 수기'한여름 밤의 꿈'으로, 44개 팀을 제치고 단체 부분 최우수상에 선정됐다. 수상자 중 유일한 고등학생 팀이다. 이번 공모전에 직접 수기를 써 제출한 동아리 부장 3학년 하경원(18)양은 "벽화를 보고 밝아진 동네 주민들의 표정을 보고 내가 더 행복했다. 내가 가진 재능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결국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코코스는 2009년 평소 그림이 취미인 학생 서 너 명이 모여 그림을 통한 재능 기부 동아리로 윤곽을 잡았다.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4년이 지난 현재 6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매달 세 차례 이상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거주하는 요양원을 방문해 그림치료를 하고 전라남도 영광, 강원도 정선 등 해 마다 2번 낙후한 마을의 작은 센터를 찾아 벽화를 그린다. 1학년 때부터 활동한 3학년 송아인(18)양은 "동아리 이름인 코코스는 히브리어로 '밀알'이라는 뜻"이라면서 "'작은 밀알들이 모여 세상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바람을 담았는데 현실이 돼가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학생 신분으로 봉사활동에 매달리는 게 힘들었을 법도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배운 게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2학년 이유현(17)양은 "주변에서 '스펙쌓기용 아니냐'고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하고 '학생'이기 때문에 '역량'에 대한 편견의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면서 "그럴수록 자주 찾아가 만나고 변함없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더니 나중에는 마음을 열어주시더라"고 말했다. 2학년 곽영현(17)양 역시 봉사의 의미를 현장에서 터득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시던 어르신들도 한 두 시간 함께 어울린 뒤 갈 때가 되면 '언제 또 올 거냐'고 물으시는 거에요. 봉사는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라 받는 것도 많다는 걸 알게 됐죠."
코코스 활동을 통해 얻은 배움을 사회에 나가서도 다시 펼쳐내겠다는 것이 이들의 포부다. 몇 달 뒤면 졸업을 하고 동아리를 떠나는 하양은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봉사활동을 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며 "나를 희생하고 남을 돕는 봉사가 아니라 소통을 통해 모두가 행복해지는 디자인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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