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시 8급 공무원 김모씨의 황당한 거액 횡령 사건 내막을 보면 능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에 걸쳐 시 예산을 뭉텅뭉텅 빼내도 이를 감시하고 적발하는 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김씨가 공금을 빼낸 시점은 회계과에 재발령 받은 2009년 7월부터였다. 앞서 4년에 걸쳐 직원급여와 세입ㆍ세출 등 회계업무를 맡았던 그에게 순환보직 인사원칙을 어기고 회계과에 복귀시킨 것 자체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었다. 부인이 사채놀이를 하다 거액의 빚을 져 고민하던 김씨는 복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3년 만에 횡령액수는 76억 원으로 불어났다. 빚을 갚고, 친척들에게 아파트를 사주고 외제차를 굴리는 동안 시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거의 모든 시 업무는 전산화 되어 있는데 유독 김씨가 전담한 업무는 수기(手記)에 의존해온 데 원인이 있었다. 전국의 지자체는 정부가 수년 전 개발해 보급한 지방재정전산시스템인 'e-호조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수시는 "수기로 하는 게 전자시스템보다 빠르고 정확하다"고 한 김씨의 말만 믿고 그가 전담한 업무만 예외로 해줬다. 예산과 지출, 계약, 부채 등 지방재정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시스템만 사용했더라도 횡령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박 겉핥기 식의 감사도 김씨의 범죄행각을 돕는데 한 몫을 했다. 김씨가 돈을 빼돌린 3년여 동안 여수시의회와 전남도 등에서 문제의 회계과에 대해 10여 차례 감사를 실시했지만 단 한 차례도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수시는 사건 보름 전에 비리 제보를 받고 회계과 특별감사를 벌였으나 역시 비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번 사건은 자체 감사가 아니라 감사원의 공직감찰 과정에서 들통이 났다. 역대 정부는 하나같이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뿌리뽑겠다고 공언해왔지만 달라졌다는 얘기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특단의 대책을 내놓으려 할 게 아니라 기존에 있는 부패방지시스템만이라도 제대로 굴러가게끔 해도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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