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내가 사는 동네에는 얼마 전까지 버스정류장이 있는 길가에 작고 허름한 빈 건물 하나가 서있었다. 쓰임이 다한 수도가압장이었다.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저 건물이 도서관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대규모의 도서관이 아니라, 그저 동네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에 구멍가게처럼 끼어있는 작은 도서관. 소장도서가 많지 않아도, 규격화된 책상과 의자가 없어도 된다. 산보를 하거나 물건을 사러 나왔다가,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또는 부부싸움을 한 어떤 날에, TV 앞에 앉는 저녁 대신 스스럼없이 문을 밀고 들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 정류장 앞인데다 옆으로 가게들과 인왕산산책로까지 이어지니 이보다 좋은 길목도 없어 보였다. 동네마다 이런 작은 도서관들이 있다면, 세상 살아나가는 일이 지금보다 나아질 것 같았다.
‘작은 도서관’에 대한 생각은, 여러 해 전 가을 무렵 시작되었다. 일산에 점심 약속이 있어 가던 길에 우연히 ‘웃는책 어린이도서관’ 앞에 걸음이 멈춰졌다. 이름도 재미났지만 투명한 유리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건물 안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책이 빼곡한 책장 사이에 아이들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들어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주민이자 시인인 이가 한 동네 아이들이 ‘책을 장난감 삼아, 도서관을 놀이터 삼아’ 놀 수 있도록 자신의 살림집 일부를 열어 마련한 도서관이라고 했다. 시인의 마음 씀이 어여뻤다.
그 때 지인을 만나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먹었던 마음 하나는 기억난다. 나중에 나이 더 들면 내가 사는 집 한켠을 창고처럼 터서, ‘시집도서관’을 열어도 좋겠다는 생각. 시집은 부피가 얇고 작으니, 꼭 큰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터였다. 대학시절부터 산 시집들이 책장 한켠을 메우고 있다는 점이 그런 공상을 가능케 했다. 안에는 의자를 두어 개 놓고, 좁으면 바깥에 다리쉼을 겸할 수 있는 장의자를 두어도 좋을 일이었다. 누구든 오다가다 들러 시 한편 읽고 가는 그런 곳.
그래서였을 것이다. 동네에 휑뎅그래하게 서 있던 수도가압장이 윤동주문학관이 된다고 했을 때 혼자 설레고 반가웠던 것이. 으리으리하게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쓰임이 다한 건물을 고치고 다듬는다는 점도 반가웠다. 얼마나 근사한 재활용인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 최초의 발상자에게, 그것을 실행하는 우리 구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출퇴근길에 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는 건물을 창밖으로 내다보곤 했다.
드디어 윤동주문학관이 개관했을 때, 제일 처음 들른 마을 사람 중 하나가 나였을 것이다. 건물은, 기대치를 넘어섰다. 시인 윤동주의 육필원고에서부터 유품, 사진자료들이 전시되어있었는데, 특히 물탱크를 활용한 공간에서 시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볼 때는 건축가의 이름을 외고 싶을 정도였다. 수도가압장이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듯이, 문학관이 우리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돕는 ‘영혼의 가압장’이라는 대목도 감동스러웠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개관 초 한번 다녀온 뒤로, 산책길에 한 번 더 들러 보고는 다시 걸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유리진열장 안의 전시품처럼 ‘박제’된 느낌. 윤동주 시인의 시집들이 진열된 곳에 의자가 있었지만, 앉아서 시를 읽을 만한 정서적인 공간은 못되었다.
영인본 원고 대신, 아니, 길림성에서부터 우물 목판을 옮겨놓는 대신, 시를 앉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좀 더 둘 수는 없었을까? 혹은 관람객들에게 문학관 소개 팸플릿 대신 시가 적힌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준다면 어땠을까? 문학관을 나와 건물 뒤로 이어진 숲길을 걷거나 언덕을 오르면서, 어쩌면 아주 오랜만에 시를 외우려 시도해볼지도 모를 일이다. 저마다 시 한편, 가슴에 담아 가는 것이다. 유적을 전시한 문학관으로서 시인의 '기림’도 좋지만, 인왕산 인근을 찾아든 나들이 길에, 동네 주민들과 아이들의 산보 길에 손과 입에서 윤동주와 그의 시가 다시 살아나는 ‘살림’. 시인이라면 어떤 것을 더 좋아했을까.
윤동주를 ‘동섣달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시인이라고 평한 정지용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 무명 청년시인의 유고시집 서문의 청을 받고 고심하다, 서문을 써내려간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서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이고 보면 그만 아닌가?”라고. 그 말이 내 아쉬움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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