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빠르다. 쏜살같이 시간이 흐른다. 우물쭈물하다보니 대선이 정확히 50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대진표가 확정되지 않았다. 문재인은 후보단일화 하자며 안철수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안철수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계속 시간을 끌고 있다. 물론 국민들 입장에서는 짜증이 난다. 하지만 두 진영의 밀고 당기기에 흥미진진한 묘한 구석도 없지는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정치인은 서생의 문제인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정치는 명분으로 말한다. 안으로는 치사한 속셈이 있을지라도 겉으로 말은 그럴 듯해야 한다. 그게 정치다. 대의명분을 앞세워 권력욕을 감추는 것은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권력을 탐하는 그 징그러운 민낯을 그냥 드러내는 것은 염치(廉恥) 없는 짓이다.
1990년 초 3당 합당이 있었다.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다 알아챘다.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극복을, 김영삼(YS)은 차기 대통령이 되려고, 김종필(JP)은 집권세력으로 편입을 바라는 각자의 계산들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그러나 세 사람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드디어 역사적인 대타협'을 이루어냈다고 내세웠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뤄진 김대중(DJ)과 김종필의 'DJP 연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유권자들은 이미 읽고 있었다. 4수에 도전하는 한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통령이 되고자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의 절박한 심정을 지렛대로 정치생명을 연장하려는 것을. 그래도 두 70대 노(老)정객들은 '내각제'를 고리로 '망국적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대의명분이 부족하면 상식을 뛰어넘고 의표를 찌르는 감동이라도 있어야 한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안철수와 박원순 두 사람이 보여준 극적 드라마 같은 그런 '정치적 퍼포먼스' 말이다. 물론 노태우의 '6ㆍ29 민주화선언'같이 극적인 요소도 있고, 대의명분도 그럴 듯해 보이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지금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는 과연 무엇을 위한 단일화인가. 오로지 새누리당과 박근혜의 집권을 막겠다는 것 외에 단일화의 대의명분이 무엇인지 들어본 바가 없다. 자칫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식의 단일화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우리 사회를 다시 '보수 대 진보'의 분열과 대립구도로 몰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갈등을 자양분으로 집권을 하겠다는 것은 아닌지.
안철수가 말하는 대로 정치쇄신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명분이라도 있다. 낡고 시들고 병든 오늘의 정당과 정치로는 더 이상 국민들의 삶을 지켜줄 수 없기 때문에 완전히 뒤집어엎겠다면 모르겠다. 그를 위해서 여도 야도 그 어느 쪽도 아닌 새로운 제3의 길을 가겠다면 또 모르겠다.
안철수는 8월30일 충남 홍성 주민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식으로든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안철수의 속마음이 정말 그렇다면 그는 이번에 승패를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정신의 개척자가 될 것이다. 백번을 양보해서 립 서비스 차원에서 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염치는 지키는 것이다.
문재인은 단일화를 위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말하면서도 '단일화 4대 원칙'을 내세운다. 그런데 4대 원칙의 내용이 다름 아닌 '안철수에게 호랑이 굴로 들어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 달라'는 것이다. 번지수가 틀렸다. 진정 단일화를 원한다면 친노패권주의와 지역주의의 상징인 이해찬 대표, 박지원 원내대표부터 과감하게 물러나야 한다. 그러고 나면 길이 보일 것이다.
사람들은 2002년 대선 때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짜고짜 단일화' 결과 정몽준은 꿩도 매도 다 잃었고, 노무현의 참여정부 5년은 폐족(廢族-조상이 죄를 지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함)으로 마무리되었음을.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알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풀리는 법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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