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전국 최초로 '태극기 도시'를 선포한 경기 구리시는 올해 초 새로운 태극기 조형물을 계획했다. 국내에서 두번째로 높은 75m 규모의 국기게양대다.
시는 아차산 자락(위치도)을 최적의 입지로 선정하고 올해 안에 완료하기 위해 예산을 확보했지만 태극기 설치는 어려워졌다. 근처에 있는 조선 3대 왕 태종의 후궁 명빈(明嬪)의 묘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28일 구리시에 따르면 국기게양대를 설치하기 위해 시가 신청한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가 지난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서 부결됐다. '약 170㎡인 기초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야 하고 유지관리를 위해 임시도로를 내야 하는 등 문화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게 부결 이유였다. 국기게양대는 사적 제364호인 명빈묘와 144m 떨어져 문화재 경계선부터 반경 500m 이내인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중에서도 1구역(보존구역)에 속한다.
시는 애국심을 일깨우기 위해 국기게양대 설치를 추진했다. 아차산을 선택한 것은 고구려의 기상이 서려 있는데다 워커힐호텔 앞 아차산로와 강변북로, 올림픽대로 등 서울에서 구리로 통하는 도로들에서 가장 잘 보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국기게양대는 비무장지대(DMZ) 내 민간인거주지 대성동에 있는 100m짜리다. 아차산 국기게양대는 이보다 25m 낮지만 산 중턱에 세워져 실제 보이는 위치는 더 높게 된다.
하지만 아차산에는 명빈묘뿐 아니라 아차산성과 보루군(堡壘群) 등 다른 사적들도 산재해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아차산 중 서울 광진구나 중랑구 행정구역에 국기게양대를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는 재심을 요청할 방침이지만 또 부결되면 아차산이 아닌 전혀 새로운 장소를 찾아야만 한다.
시책사업이 막히게 된 구리시는 명빈묘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1991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이 된 명빈묘는 태종의 후궁 묘라는 것 외에는 별 기록이 없다. 명빈묘 앞 안내판은 물론,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도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태종의 후궁으로 성종 10년(1479)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는 정도만 설명돼 있다. 시 고위 관계자는 "묘 입구를 막아 놓아서 관람도 안되고 찾는 사람도 없다"며 "영리사업이 아니라 애국심을 높이자는 취지인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반면, 문화재청은 빈(嬪)이 후궁 중 품계가 가장 높은데다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입증됐다는 입장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설계를 보완해 현상변경 재신청이 가능하지만 문화재 보전보다 개발행위에만 치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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