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119…."
26일 오전 2시10분. 서울 광진소방서 상황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신고자는 어눌한 말투로 "119"를 되뇌었지만 곧 이 말조차 잦아들었다. 사고를 직감하고 소방차 20여대가 출동했다.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화재 현장을 발견하는 데 4분, 불을 끄는 데까진 9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세들어 살던 중증 지체장애인 김모(33ㆍ여)씨는 26㎡ 크기 원룸 출구 앞에 엎드린 채 숨져있었다. 3m도 안 되는 거리를 기어서 탈출하다 그만 질식하고 만 것이다. 김씨는 근육이 마비돼 다리도 손도 말을 듣지 않는 뇌병변 장애자다. 이날 싱크대 콘센트 쪽에서 불이 났을 때도 입으로 터치펜을 물고 스마트폰으로 신고했다.
김씨는 2008년 "세상을 당당하게 살겠다"며 부모님 걱정을 뒤로하고 독립했다. 전동휠체어를 몰며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2005년 장애인이 출연하는 단편영화를 만들어 KBS를 통해 방송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 회사에 취업해, 24편의 다큐 제작에도 참여했다. 최근에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다른 중증 장애인들에게 자립의 권리와 방법 등을 교육하고 상담해 주는 일도 했고 주말은 입으로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아버지(63)는 "제 몸이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해 장애인 권익 찾기 운동도 열성이었다. 뭐든 혼자서도 잘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김씨도 넘지 못하는 벽은 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내리기, 밥을 먹고 용변을 보는 일상적인 일은 다른 사람 도움 없인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이 나기 전날도 밤 11시까지 일상생활을 돕는 활동보조인 신모(23)씨가 김씨 곁을 지켰다. 신씨는 "최근 남자친구도 생기고, 원하던 곳으로 직장도 구해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라며 눈물을 삼켰다.
김씨 빈소가 마련된 한양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중증장애인들이 소식을 듣고 몰려왔다. 지난달 경기 광명에서 중증장애인 허모(30)씨가 숨진 일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탓인지 이들은 "정부가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확대해 달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인공호흡기 없이는 숨을 쉴 수 없는 허씨는 활동보조인이 퇴근하고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은 잠깐 사이 빠져버린 인공호흡기 호스를 혼자서 끼지 못해 질식사했다.
정부가 중증장애인에 제공하는 활동보조인 서비스는 100시간 정도로 하루 3시간 남짓. 박홍구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서울지부장은 "장애에 따라 24시간 활동보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데도, 정부는 서비스를 늘이지 않고 예산 타령만 하고 있다"며 "1급 중증 장애인만 전국에 9만명 있는데, 수급대상자 5만명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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