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걱서걱… 어둑어둑… 토닥토닥
홀로, 남은 격정을 다독이는 가을 숲이 고요한 위로를 건넨다
오만한 인간은 잊고 있었구나
깊이와 부피로 와닿는 생명력을
오랜 벗이 곁에 숨쉬고 있음을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이 이란 책에 쓴 것처럼, 걸음으로 거리를 재면 세상은 확 달라진다. 지하철 이용자에게 거리는 정류장 숫자나 소요시간으로 단촐하게 산정되지만 같은 거리를 걷는다면 시간에다 짐 무게, 다리 통증, 갈증까지 감안해야 한다. 가령 승용차로 50㎞라면 반나절 나들이 장소로도 무난하겠지만, 20㎏쯤 되는 배낭을 매고 등산을 하거나 숲길 트레킹을 해야 한다면 까마득해진다. 그 때의 길은 태어나면서부터 얹혀 다니는 데 익숙해진, 그래서 물리적 거리보다는 시간거리를 먼저 따지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태고의 (공간)감각을 고통스럽게 일깨워주는 공간이 된다. 숲이 그런 공간이다. 불빛도 정거장도 케이블카도 없는. 더 깊은 숲 더 높은 숲을 누리려면 한숨까지 아끼며 오직 걷는 도리밖에 없다.
서울 홍릉수목원은 한 시간 남짓 걸으면 웬만큼은 둘러볼 수 있는 아담하고 야트막한 숲이다. 대개의 수목원들이 그렇듯, 그 숲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숲이다. 숲의 나무들은 지형과 토질과 기후에 알맞고 시험림으로서의 연구 필요에 맞춰 선택된 것들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숲보다 단위면적당 수종이 훨씬 다양하고 환경과 영양 방제 등 최상의 배려를 받는, 다채롭고 건강한 숲이다. 관념 속 자연의 숲이 비가림 시설도 없이 친한 이웃끼리 어울려 앉아 전을 편 시골 장터라면 홍릉의 숲은 선택된 수종들이 품목별로 진열된 백화점 같은 숲이다.
주말 오후 2시의 홍릉. 10여 명의 탐방객들이 숲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숲길 트레킹을 시작했다. "참나무 여섯 형제 아세요? 갈참 졸참, 굴참, 신갈, 떡갈, 상수리나무죠. 그 중에서 이 녀석은 상수리나문데, 상수리라는 이름이 어떻게 붙었나 하면…" 초로의 숲 해설사는 따뜻한 의인의 화법으로 숲과의 친분을 과시했고, 사람들은 옛 이야기처럼 구수한 설명을 받아 적으며 틈틈이 나무 껍질을 쓰다듬거나 사진을 찍고, 아직은 선 이름을 혼자 되뇌어보곤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걷고 나면 출발 지점, 콘크리트 깔린 숲의 가장자리다. 문명의 자리에서 되돌아본 숲은 스폰지처럼 푹신한 땅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얼크러져 사는, 어둑한 조도 탓인지 조금은 두렵고 설레던 처음 그 숲과는 달라져 있다. 숲의 깊이와 부피를 숫자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느낀 뒤이기 때문이다. 어디쯤 가면 어른 키보다 웃자란 회양목이 있고, 어느 모퉁이를 돌면 은방울꽃무지를 융단처럼 깔고 선 졸참나무가 살고, 그 곁에는 올해 도토리 농사를 유난히 잘 지어 다람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는 상수리나무가 으스대며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조금 전 지나쳐온 비탈 한 켠의, 새치름하게 푸르던 당단풍도 며칠 뒤면 농염하게 물들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이도, 남편 바람기를 잡아준다는 황벽나무 열매가 맺히는 내년 가을쯤 다시 오마 하고 속다짐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세상사가 대개 그렇듯, 존재의 사소한 사실들이 조금씩 색다른 의미로 각인되는 과정을 통해 숲은 비로소 보통명사의 숲에서 개별적이고 입체적인 고유명사의 숲이 된다. 사귐이 깊어지면, 숲 이름 앞에 '나의' 혹은 '그 시절 우리의'와 같은 소유격을 붙이고 싶어질 수도 있다. 물론 그 소유는 '임야'라는 지목과 면적으로 사유화(私有化)되는 대상으로서의 숲이 아니라, 관념과 기억과 애착이 맺히고 익는 그런 소유여서 뭇 사람의 소유와 겹치고 엉켜도 아무렇지 않게 공유되는, 소유 너머의 소유다. 그것은 숲이, 우리의 관념 속에서,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누리는 공간이기 때문이고, 하늘이나 바람과 달리 구체적이고 영속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소유는 시간과 거리를 초월한 향유의 다른 이름이다. 물론 우리가 누린다고 생각하는 그 숲은 거의 언제나 숲의 가장자리, 숲이 떠난 숲 속의 빈터거나 인간이 숲 일부를 허물어 마련한 오솔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나마도 그런 숲을 많이 알고 또 많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여러모로 다를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숲은 지니고 있다.
도시의 가을은 자잘하게 돋는 소름처럼 문득 찾아오지만 숲의 가을은 한지에 물 스미듯 다가와 고요히 깊어진다. 여름 내내 완강하던 초록의 기세가 한 귀퉁이에서부터 흐트러지면 다른 잎들도 슬그머니 홍조를 띠기 시작하고, 꽃보다 붉다는 순간의 절정이 잦아드는 속도로 서걱서걱 버석버석 말라간다. 숲의 봄이 폭발하듯 느닷없이 들이닥친다면 숲의 가을은 어둠처럼 어둑어둑 다가온다. 거기 깃든 고요는 꽁꽁 싸맨 겨울의 적막이나 침묵과 다른, 돌아 앉아 남은 격ㅐ?혼자 다독이는 고요, 조금씩 흔들리며 처연히 가라앉는 고요다. 여름의 숲이 휴식을 준다면 가을의 숲은 위안을 준다. 홍릉의 숲과 그 숲에 깃들인 생명들도, 은밀히 흐트러진 잎의 빛깔과 다람쥐 무리의 다급한 움직임으로, 곧 다가올 순응의 시간 앞에 동요하는 듯 보였다. 고요 속의 그 동요는 부질없는 농성을 준비하는 전장의 어수선한 고요와 닮아 있었다.
홍릉 숲이 가공된 숲이라고 했지만, 인간이 공간을 사유하고 개념화한 이래 모든 숲은 가공되거나 통제돼왔다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공간을 지배하게 된 인간은 비극적이지만 부득이하게도, 숲에 대한 억압과 약탈을 멈춘 적이 없다. 열대우림이든 아한대의 침엽수림이든, 숲은 우리 안에 갇힌 짐승처럼 제 영역을 제한당하고 자원으로서의 가치 체계 안에 묶여 관리돼왔다. 콘크리트의 방벽과 밧줄로 경계 지어진 오솔길, 정기적인 벌채와 간벌은 숲과의 공생을 위한 인간의 불가피하고 또 온당한 개입이겠지만, 숲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마저도 가혹하고 야멸친 조치다. 심지어 숲을 사랑한다며 다가서는 행위조차 숲에게는 원치 않는 참견이고, 때로는 치명적인 사생활 침해라고 한다. 홍릉수목원의 조재형 박사는 "나무나 풀의 영토를 밟아 땅을 다지는 것만으로도 여린 식물의 생장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숲에서는 최소한의 행위가 최선의 행위"라고 말했다.
나무는 늙지만 숲은 늙지 않는다. 환경 변화나 재해, 병해충으로 인해 병든 숲과 그렇지 않은 숲이 있을 뿐이다. 숲은 어디서나 어린 나무와 늙은 나무, 우람한 나무와 왜소한 나무, 무릎 높이의 관목과 풀들이 어우러져 서로 다투고 의지하며 모둠살이 생태 공간을 꾸린다. 한국의 숲을 청ㆍ장년기의 숲으로 세대 구분하는 것은 우리 조림의 역사가 40년 남짓 됐다는 사실을 들어 흔히 쓰는 말이지만, 한날 한시에 단일 수종을 심어 가꾼 특정 숲에 한해 제한적으로 쓸 수 있는 표현일 뿐이라고 조 박사는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따른다면, 숲의 역사는 숲이 자리잡은 땅의 변천사, 곧 인간의 역사일 따름이다. 존재하는 모든 숲은 역사 너머에서 인간의 역사와 무관하게 존재해 왔고, 땅의 역사로 편입되지 않는 한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그래서 숲은 영속의 푸른 알레고리가 된다.
언뜻 든 생각이지만 모든 인간의 폭력은, 그 대상이 자연이든 인위든 생명이든 사물이든, 관점의 폭력에서 비롯된다는 의심도 해보게 된다. 좋은 숲이란 건강한 숲이 아니라 실용ㆍ심미적으로 가치 있는 숲이고, 그 숲이 제공하는 산소와 그늘과 붉고 푸른 색조들은 언제나 더 큰 가치와 나란히 양팔저울 위에 얹힐 수 있다는 식의 관점. 예컨대 숲의 한 식구인 장소하늘소는 천연기념물이지만 엄연한 숲의 해충이다. 장수하늘소는 수세(樹勢)가 약한 나무에 구멍을 뚫고 먹이활동을 하며, 이동 과정에서 참나무잎마름병 등 병해충도 옮긴다. 생물종다양성이 비록 지금은 위선적으로나마 중시되는 시대여서 보호막을 두르고 있지만 언제 숲이라는 더 큰 가치(혹은 명분)와 견줘져 위기 속으로 내팽개쳐질지 모른다. 숲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숲과 숲에 깃들인 생명들을 떠올릴 때 그렇다. 숲과 문명세계의 경계는 철조망이나 콘크리트를 두르고 서서 단호한 듯 보이지만, 실은 공생을 위한 불가피한 침해의 현실과 그 현실을 빙자한 관점의 폭력, 탐욕의 폭력이 해안선처럼 넘실대고 있다.
조락(凋落)은 쇠퇴나 영락의 동의어다. 반면에 낙엽은 숲의 생명력과 건강성의 선명한 물증이다.. 숲은 낙엽의 부피와 다채로움으로, 물기 없이 바람에 쓸리는 그 가벼운 버석거림으로 제 존재를 알린다. 우리가 잎 진 가을의 숲 길을 걸으며 그 소리를 몸으로 공감하고 또 잃어버린 공간의 감각을 일깨우는 일에 대면 좋은 공기 마시고 몸 건강 챙기는 일은, 상수리나무가 도토리를 맺어 숲을 풍요롭게 하는 것처럼, 부수적인 혜택일지 모른다. 그런 숲들이 외로운 섬처럼 우리 곁에 있다.
선임기자 proose@hk.co.kr
김주성기자 poe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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