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저자가 '두 번째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아 낸 이 책의 서문에서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문장은 "(자연과 생태에 관한) 책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생태적 감각이 무디어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글이었다. 한철 유행의 열병처럼 '생태'가 유통되고 있다는 느낌, 생태라는 휘장 뒤에서 반(反)생태적 행태들이 무감각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 범람하는 헌사(獻辭)와 함께 생태의 본질- 그것이 뭔지 아직 잘 모르지만-조차 떠내려가버려 영영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생태적 체험을 앞세워 자신의 윤리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맥락 없이 '나'를 훈계하려 드는 것 같아 은근히 반감마저 들던 차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서 요약하기 조심스럽다. 가령 "생태(적 글쓰기와 성찰)의 근본은 천지인(天地人)에 있다"는 저자의 말은, 너무 흔히 들어와서 진부하게 여겨질까 걱정스럽다. 빨래하기 귀찮아 옷을 홀딱 벗고 일하다 급소를 벌에 쏘이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일화는 생태원리주의자의 치기(稚氣) 혹은 너무 특별해서 비현실적인 과시로 이해될지 모른다. "나는 원시수렵시대의 자급자족 인간을 꿈꾼다"는 말은, 그 자체만 본다면, 또 너무 케케묵어 낭만조차 바랜 한 오타키스트(autarkist)의 고집쯤으로 폄하될 공산도 있다.
한두 문장으로 요약되는 '핵심'을 지닌 책들도 좋지만, 표지에 적힌 그럴싸한 핵심보다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다가 발견하게 되는 가치들에 더 솔깃해질 때가 많다. 저자의 이 책은, 촘촘히 곡진했던 그의 삶의 이력처럼, 그런 값진 군더더기들로 그득하다. 예컨대 '전문가타령'이란 장에서 저자는, 생태적 삶을 살겠다며 귀농한 이들조차 사소한 일- 방충망을 치거나 장작난로를 놓거나 하는-을 앞두고도 '전문가'를 찾는 반응들을 황당해하며 "(문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라고 단언한다. "귀농이나 생태적 삶은 결코 전문가의 길이 아니다."
이 책은, 마치 그가 오랜 세월 아껴 보듬어온 잡초 들판 같다. 그래서 한두 송이의 돋보이는 들꽃에 돋보기를 들이대는 게 무르춤해진다. 입고 먹고 싸고 일하고 노는 일상의 자잘한 단면 속에서 뽑아낸 체험과 사유와 지혜와 권유들 중에는, 물론 읽는 이에 따라 유별나 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미처 알지 못한 생태의 곱고 거친 면들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 생태적 삶의 가치를 들어 누군가가 세상을 타이르거나 훈계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이 책의 저자가 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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