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인문학 위기론’이 나온 지는 한참 됐다. 학계가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제기한 것은 1997년 전국 21개 국공립대학 인문대 학장들의 ‘인문학 제주 선언’이다. 선언은 인문학 위기를 환기시키며 인문정신의 회복과 인문학에 대한 지원을 촉구했다. 그 후 15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 가치를 고민하는 인문학보다 당장 쓸모 있는 기술적 지식을 높이 치는 기능주의적 사고가 팽배함에 따라 인문학은 천덕꾸러기가 됐다. 인문정신의 보루여야 할 대학에서조차 인문학은 학과 통폐합 등으로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26일 서울 YWCA 강당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출범하는 한국인문학총연합회(이하 인문총)는 인문학 위기에 대응하는 학계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최초의 공식 창구다. 관련 학술단체뿐 아니라 공공단체와 민간단체까지 망라한 기구로, 한국철학회ㆍ영어영문학회ㆍ한국언어학회 등 27개 학회가 준비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다.
“인성이 황폐해지고 자살과 폭력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인문학에 대한 수요는 더욱 커지고 있지만, 인문학의 위상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는 데 개별 학회의 활동으로는 한계가 있어 협의체를 만들게 됐습니다.”
인문총의 5인 공동회장 중 대표회장을 맡은 김혜숙(58)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인문총은 인문학 발전을 위한 학계의 노력 외에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인문학적 어젠다를 제시하고 인문학 관련 학문 정책에 대한 제언을 해나갈 계획이다.
97년 ‘인문학 제주 선언’ 이후 인문학을 지원하는 움직임이 일긴 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나서서 인문 주간을 제정했고,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이 생겼다. 학문 후속 세대를 육성하기 위해 박사급 연구자와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HK사업, BK사업도 생겼다. 하지만 이런 제도는 근본적 처방이 되지 못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HK, BK 사업은 한시적 사업이고 선정된 소수만 혜택을 받습니다. 10년 기한인 HK사업은 4년 뒤, 7년 기한인 BK사업은 올해로 끝납니다. 인문학 기반이 몹시 열악한데도 한국연구재단(교과부 산하 준정부기관)의 3조원이 넘는 올해 예산에서 인문학 지원은 전체의 10%도 안 됩니다. 거시적 차원에서 좀더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학계의 걱정과 달리 대학 밖에서는 일반 대중 사이에 인문학 열풍이 한창이다. 때문에 인문학 위기는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학계가 자초한 것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그런 점이 없지 않지만, 인문학 지원은 학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가 더 높아지려면 인문학적 기반이 강해져야 합니다. 한국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경제 발전을 이룩한 것도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적 인문 전통의 힘 덕분인데, 우리 사회는 인문학의 가치를 홀대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전하면 잘 산다고만 말할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밑그림이 있어야죠. 거기에 대한 답이 없으면 삶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문학은 바로 그런 가치들을 묻는 것입니다.”
인문총 창립대회는 인문학의 현황과 전망, 학술지 지원 제도의 문제점을 다루는 토론회를 겸한다. 인문정신의 회복과 인문학 발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선언문도 발표한다. 글ㆍ사진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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