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아이들 사이에 '아더메치'란 말이 유행했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를 줄인 말이다. 대개의 유행어가 그렇듯, 초등학교 때는 열심히 따라 하다가 중학생이 되고는 어쩐지 진부하고 유치한 느낌이 들어 쓰지 않게 됐던 말이다.
그런 옛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은 대선을 앞둔 양대 정당 후보들의 심사가 그럴 것이라는 짐작이 들어서다. 개인적으로 내키지 않는데도 '국민'의 이름으로 던져진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응하다 보니 자세가 엉거주춤해 보인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5ㆍ16과 10월 유신,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인식을 어렵사리 수정하고도, 정수장학회 문제에서는 적극성이 뚝 떨어졌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이른바 '3철' 등을 내치는 인사로 열린우리당 색채를 희석했지만, 정작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에 대해서는 어정쩡한 태도에 머물고 있다.
버티기로 비쳐지기 쉬운 자세다. 이 때문에 앞서 두 후보가 각각 행한 역사인식 수정이나 인사쇄신의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후보에 던져진 이런저런 요구의 구체적 내용과 실현 가능성, 정당성 등을 따져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우선 정수장학회에 대한 박 후보의 입장 수정은 기대난이다. 최근의 사회적 물의에 대해 최필립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이사들이 책임을 지라는 데 덧붙일 주문이 마땅찮다. 설립자의 딸이라는 박 후보의 사실적 지위에 미루어 모종의 정치적 해결이 가능하리라는 관측이 무성했지만, 최 이사장의 완강한 거부로 억측이 되고 말았다. 박 후보와 최 이사장의 의도적 연출을 의심하더라도 더 이상의 요구가 어려워진 점은 다를 바 없다. 박 후보가 정면돌파를 결심했다면 더욱 그렇다.
정치인은 늘 국민 정서를 살피고, 특히 선거 목전에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게 마련이다. 권력 획득이라는 목적에 도움이 되는 방편이라면 찬밥 더운밥을 가리지 않고, 어떤 '아더메치'한 상황도 참아 넘긴다. 그것이 현실 정치의 참모습임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하고,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강제할 수단이 없다면 스스로의 요구를 한번쯤 되돌아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지금 정확히 그 단계에 와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박 후보는 그나마 정말 심각한 '아더메치' 상황을 겪진 않았다. 국민 다수의 정서에 부합하는 역사인식은 후보의 자질 검증에서 빠뜨릴 수 없는 객관적 요소로서 대선 출마 선언과 동시에 각오했을 예상문제였다. 아버지의 일을 대신해서 반성하고 사과하기까지의 심리적 고통이 컸더라도 객관적 정당성을 갖춘 요구에 응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에 비해 문 후보의 억울함은 더하다. 일반 유권자 100만 명이 참여한 경선에서 승리하고도 곧바로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 과제를 급선무로 떠안았다. 박 후보와의 대결에서 승산을 점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자 중간 목표인 후보단일화를 위한 '아더메치' 감수라지만 도가 지나치다. 인내의 성과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무엇보다 안 후보가 단일화 조건의 하나로 제시한 '민주당 개혁'의 실제 내용이 불투명하고, 그런 요구의 정당성 근거로 안 후보가 든 '국민의 요구' 또한 아리송하다. 그제 안 후보가 밝힌 정치개혁 구상에서 민주당과 직결된 것이라고는 대선을 앞둔 처지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중앙당 해체밖에 없었다.
흔히 이 대표나 박 원내대표와의 결별이 거론되지만, 후보 경선에 앞선 세력연대를 정치능력이 아닌 정치행태의 문제로 보는 것은 안 후보의 자기모순이다. 스스로 정치공학의 극단적 형태인 후보단일화를 겨냥하고 있는 처지에서 어떻게 정상 정치에서도 흔한 당내 세력연대나 제휴를 구태로 몰아붙일 수 있나.
그래도 달리 방책이 없다. 정치가 애초에 '아더메치'의 끝임을 위안으로 삼는 외에는.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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