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산맥의 뼈를 발라 가지런하게 한다. 가을 산맥의 뼈들은 여름의 질퍽거리던 숲과 흙을 떨쳐버리고 흰 뼈대의 얼개만으로 뭍의 골조를 이루어, 설산고행하는 부처의 가슴팍 늑골을 닮아간다. 산맥들은 그 품안에 먹이던 모든 잎들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마른 뼈만을 시공 속에 드러내면서 겨울을 나는데, 그때 모든 골산(骨山)은 토산(土山) 위로 뜬다. 길은 살 속으로 그리고 흙 위로만 뻗어 있는 것이어서 토산이 끝나는 흙의 가장자리에 서서 나는 산의 뼈로 건너가는 등산로를 찾아내지 못한다."
누렇게 바랜 책을 주머니에 꽂고 경주에 다녀왔다. . 십수 년 전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이다. 당시엔 무명 작가가 쓴 무명 기행문이었다. 책 속에 서늘히 벼려진 부벽(斧劈)의 문장 앞에 아연했던 기억이 있다. 작가는 야들한 감상 대신 도끼로 찍어 내리는 듯한 언어로 여행의 상념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국어의 자모로 이뤄진 이 부벽준의 풍경화를 나는 시립 도서관 철로 된 책시렁 위에서 발견했다. 절판된 책을, 기어이 정가의 곱절을 주고 헌책방에서 샀다.
이 책에 실린 'AD. 632년의 개'는 작가가 어느 가을날 경주 남산을 여행하고 쓴 에세이다. '2월에 흰 개가 대궐 담 위로 올라왔다(진평왕 53년)'는 단 한 줄의 기사로부터, 작가는 인간 세상의 불가해성을 길어내 차가운 문장 속에 응결시켰다. 짤막한 이 에세이가 이후 밀리언셀러가 된 것을 포함하여 작가의 여러 작품 중에 가장 압밀(壓密)한 글이라고, 나는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김훈의 책을 사지 않는다.
"가을의 경주 남산에서는 산의 살과 피가 증발해버린 골산의 능선을 따라 부처의 뼈가 드러난다…… 기진한 능선들이 들판으로 잦아드는 언저리에서 산은 들로부터 겨우 몸을 일으키는 흙의 유순한 융기에 불과했으나 산의 골세(骨勢)는 이미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뼈의 얼개들은 산의 언저리로부터 희미한 맥을 일으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문득 힘이 솟구치는 곳에서 계곡을 옆으로 타넘고 이웃 계곡을 따라 올라온 또다른 골세와 합쳐지면서 칠부 능선 위쪽으로 뼈의 숲과 바다를 이루는데, 그 뼈줄기 모든 관절에서 부처는 피어난다."
경주 남산은 해발 500m가 채 되지 않는 산이다. 마음 먹고 등산을 하기엔 싱거운 높이고, 단풍 구경을 하기에도 활엽수림의 몸피가 빈약하다. 그럼에도 가을 남산이 붐비는 건 일천년 세월 저쪽의 사람들이 이 산에 쪼아 놓은 부처의 표정 때문일 것이다. 시월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 마애불의 이마는 말갛게 펴진다. 화강암에 새겨진 눈매도 낙엽송 그늘 아래 또렷해진다. 목이 잘려 나간 부처도 앉은 채로 꼬리뼈에 힘을 줘 허리를 곧게 세우는데, 청명한 하늘이 불두(佛頭)가 되고 깃털 구름이 광배(光背)가 된다.
김훈이 책에 쓴 대로 서쪽 산자락의 삼릉에서 남산을 타고 올라 금오봉(468m) 지나 용장사터 쪽으로 하산하는 길을 택했다. 남산 탐방객들이 흔히 택하는 코스다. 대략 4.4㎞. 두 시간이면 넉넉한 거리다. 그런데 남산의 이정표는 두 가지 색깔의 글자로 돼 있다. 흰 색은 일반 등산 루트, 노란 색은 유적을 둘러보며 걷는 문화 탐방로다. 노란색 글씨를 따라 걸었다. 이렇게 걸으면 시간이 두세 배쯤 걸린다.
"경주 남산에 불상과 불탑들이 조영되던 3백여 년의 당대사는 주술과 마법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배암들이 대궐 늪 속에서 높은 옥타브로 울어댔고 불상과 마소들이 해독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김부식의 역사 속에서는 '기근이 일어나 자녀를 파는 자가 있었다'는 단말마의 인간고와 '흰 개가 대궐 담 위로 올라왔다'는 공포의 환타지가 동격의 기사로 대접받고 있다…… 경주 남산을 어슬렁거릴 때, 나는 내 등뒤에서 짖어대는 AD. 632년의 개 짖는 소리의 환청에 끄달렸다. 개 짖는 소리는 1천3백여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내 쪽으로 건너오면서 모든 당대사의 개 짖는 소리들을 일깨웠다. 개들은 목울대의 힘줄을 드러내고 일제히 짖어댔다. 칠부능선 위쪽에서 부처들은 웃고 있었다."
일연의 엔 남산이 '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 있는 듯하다(寺寺星張 塔塔雁行)'고 기록돼 있다. 이 묘사는 아직 유효하다. 남산에서는 지금까지 112곳의 절터, 80체의 석불, 61기의 석탑, 22기의 석등이 발굴됐다. 남북으로 8㎞, 동서로 4㎞에 불과한 산세를 감안하면 신라인들이 이 산을 얼마나 신성시했는지 알 수 있다. 혹은 남산이 권력자들의 돈과 통치 이데올로기로 덕지덕지 치장된 아틀리에였는지도 모르겠다. 절집들은 등산객들이 디딤돌로 밟는 주춧돌만 남아 그 권력의 좌향을 기억하고 있지만, 돌로 된 불보살들은 절단된 신체의 단면으로 지금도 일천년 전 인간의 시선을 가리키고 있다.
"경주 남산에서는 예기치 못하는 모든 모퉁이나 굽이침에서 부처와 탑들이 복병처럼 불쑥불쑥 나타난다. 인간의 농경과 살육이 아득히 펼컨?평야가 내려다보이는 능선 위에서 어떤 부처들은 인간의 들 쪽으로 한번의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안쪽만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돌의 안쪽을 헤집지 못하는 인간의 시선은 되돌아와서 제 자신의 안쪽을 겨눌 뿐인데, 시선이 되돌아와 꽂히는 마음의 안쪽은 또 얼마나 캄캄한 돌 속이랴. 역사는 그 마음의 돌 속, 쑥과 마늘의 동굴에서 벌어진 모든 정벌과 살육과 꿈과 절망의 총화일 터이다. 부처는 돌 위에서 웃고 있다."
단풍철의 남산은 행락객들이 웃고 먹고 마시는 소리로 왁자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트레킹에 나선 외국인도 보였다. 그들의 배낭엔 막걸리통 대신 억새 가지가 꽂혀 있었다. 출렁이는 그 은빛 가지를 좇아 걷다 보니 어느새 금오봉. 여기서부터는 내리막이다. 다소 급히 꺾어지는 길을 손발로 짚고 내려오면 용장사 터가 나온다. 용장사는 조선 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1435~1493)이 은거하며 '금오신화'를 지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곳엔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과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여래는 키에 비해 우뚝한 대좌에 앉아 있다. 세 줄의 선(三道ㆍ생사를 윤회하는 인과를 불상의 목에 선으로 표현한 것)이 그어진 목 위에, 여래는 머리 대신 투명한 가을 하늘을 이고 있었다.
"이 용장사 계곡의 삼층석탑은 부처들의 봉우리 위에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탑은 가파른 체감률로 긴장되어 있었다. 탑의 체감률은 어째서 인간을 긴장시키는 것일까. 아랫돌이 더 크고 윗돌이 더 작은 이 물리적 구도는 왜 그것을 들여다보는 중생의 마음으로 하여금 먼 것들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가. 경주 남산에서 나는 겨우 거기에 대답할 수 있었다. 탑이 아름답다는 것은, 탑의 체감률이 아름답게 긴장되어 있다는 것은 현세가 고통스럽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탑은 오탁악세(五濁惡世) 속에서만 아름답다. 저물어 하산하는 내 등 뒤로 AD. 632년의 흰 개는 컹컹컹, 짖고 있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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