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와 벚나무 가로수가 붉어 가을인가 싶더니 벌써 상강(霜降)이다. 말뜻으로는 ‘서리가 내리는’ 절기지만, 서리가 눈이나 비처럼 하늘에서 내릴 리 없다. 지표면 가까이의 기온이 이슬점 밑으로 떨어지면 수증기가 물로 맺혀 이슬이 되듯, 날씨가 추워져 수증기가 풀이나 지표면에 얼어붙은 것이 서리다. ‘상강’이라면 흔히 첫서리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은 엷은 첫서리와 달리 해 뜨고 한참 지나야 풀릴 만큼 두툼하게 엉긴 된서리의 시기에 가깝다.
▦24절기는 중국 허베이(河北) 지역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위도는 한참 낮지만 빨리 달아 오르고, 빨리 식어버리는 대륙성 기후의 특성상 서리를 비롯한 기상 현상은 오히려 서울보다 보름 정도 앞서는 지역이다. 실제로 전국 곳곳에 지난해보다 6~10일 늦지만 평년보다는 며칠 앞서 첫서리가 내렸고, 서울에서도 이미 18일에 관측됐다. 지역에 따라 월말이나 내달 초면 본격화할 된서리를 관측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상강’의 절기를 느낄 만하다.
▦텃밭에서 야채라도 가꿔본 사람은 된서리의 무서움을 안다. 무나 배추, 시금치와 갓 등 어지간한 추위에는 견디는 채소를 빼고는 끓는 물에 데치기라도 한 듯 가지와 잎이 축 늘어져 버린다. 된서리가 내리기 직전에 고춧대를 훑어 고춧잎과 희아리를 건지고, 팥잎이나 콩잎을 따놓으려고 농가의 일손이 바빠진다. 요즘은 그루갈이로 보리를 재배하는 농가가 줄어들어 보기 힘들어졌지만, 이듬해 거둬들일 보리를 열심히 파종하던 것도 이맘때였다.
▦서리는 혹독한 추위가 밀려오기 전에 미리 위기에 대비하고 소멸을 준비하라고 일깨운다. 일찌감치 물길을 막아 잎을 떨구거나 잔가지를 말라붙게 한 식물은 된서리를 걱정할 게 없다. 거꾸로 한로(寒露)를 지나 이슬이 차가워졌는데도 여름의 단꿈에 젖어 잔가지와 잎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된서리가 아니라 약한 가을서리(秋霜)에도 늘어지게 마련이다. 위험요소를 감지하면 서둘러 털어야 ‘추상 같은’ 국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터이니, 정치라고 다르지 않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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