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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그리움, 힐링 그리고 편지

입력
2012.10.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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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룡 우정사업본부장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전 세계가 흥분과 기대로 들떠 있을 무렵, 우리나라에 조용히 일본영화 한편이 개봉했다. 서울 관객 70만명, 전국적으로 14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러브레터’는 사실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이전부터 입소문이 나 있었다. 개봉 전에 이미 영화를 보았다는 사람이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영화는 일본 북부의 아름다운 설원지대를 무대로, 얼굴이 같은 두 여인(1인 2역)이 죽은 한 남자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며 각자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 ‘러브레터’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지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고베에 사는 와타나베 히로코는 2년 전 등반사고로 숨진 연인 후지이 이쓰키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에 들러 중학교 졸업앨범을 보고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난데없이 답장이 날아오면서 영화는 과거로 추억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왜 편지를 썼을까? 연인은 산에서 조난당해 실종됐는데, 받지도 못할 편지를 왜 보냈을까? 바로 그리움 때문이다.

지난달 호주 남부 라그라스 해변을 거닐던 한 할머니는 해초 사이에서 유리병 편지를 주웠다고 한다. 편지는 4월 영국에 사는 네 살 소녀가 이모를 그리워하며 바다에 띄운 것인데, 평소 해변 걷는 것을 좋아했던 할머니에게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할머니는 인터넷을 통해 소녀를 찾았고 손녀가 없던 노부부는 새 가족을 얻었다고 한다. 1만6,000km를 흘러 온 그리움이 가득 담긴 유리병편지가 새로운 인연을 탄생시킨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 그리우면 편지를 쓴다. 특히 요즘처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파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그 누군가가 첫사랑의 연인일 수도 있고, 또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릴 적 친구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딱히 누구라고 정하지 않아도 무작정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이렇게 편지는 그리움의 힐링 도구이다.

하지만 막상 펜을 들면 첫 줄부터 쓰기가 만만치 않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전화 한통이면 언제 어디서나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인터넷을 통하면 전 세계 누구와도 손쉽게 연결된다. 손으로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은 이유이다. 하지만 편지 쓰기가 가장 만만치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보는 글이 아니라 상대가 읽는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맞춤법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글의 흐름은 제대로 전개됐는지, 품격은 느껴지는지 이래저래 걱정거리가 많다보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 시작조차 힘겹게 느껴진다.

편지는 미사여구로 꾸며 쓴다고 해서 훌륭한 편지는 아니다. 자기의 솔직한 마음, 정다운 마음이 담긴 진실한 글이면 가장 훌륭한 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정인보선생은 “편지는 꾸미는데서 시들고 진실한데서 피어난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로 알려진 빅토르 위고와 출판사 사장의 편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출판사에 넘기고 독자들의 반응이 몹시 궁금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위고는 결국 한 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에는‘?’만을 적었다. 묻는 게 쑥스러운 나머지 상직적인 의미로 보냈다는 것이다. 얼마 후 출판사 사장이 답장을 보냈다. 편지에는 반응이 폭발적이라는 뜻의‘!’만 적혀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은 찬바람에 저 멀리 걸음을 재촉한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저 홀로 설 수 없다. 그리운 이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이 저물도록 모르지 말고 가을 우체국 앞에서 한 통의 편지를 띄워보자. 세월이 많이 기다려주지 않는 삶 속에서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편지글로 소통하고, 또 표현하는 방법이 쉽지는 않지만 한번쯤 나눌 수 있다면 가슴 벅찬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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